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
정민은 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유진을 혼자 두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는 고민 끝에 유진에게 말했다.
"유진아, 나 대학 가더라도 네 옆에 있을게. 어머니 찾는 일, 나랑 같이 하자."
정민의 진심 어린 말에 유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정민이 어떤 마음으로 이 말을 꺼냈는지 알기에 고마웠지만, 그녀는 더는 정민에게 의지할 수 없었다.
"정민아, " 유진은 고개를 들어 정민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난 네가 항상 고마웠어. 네가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하지만 이젠 내가 해야 할 일이야. 나 혼자서."
정민은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왜 혼자 하겠다는 거야? 내가 널 도와주면 더 쉽게 어머니를 찾을 수 있을 텐데."
유진은 미소를 지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너는 네 길을 가야지. 대학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나 때문에 그걸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정민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유진아, 난 네가 더 중요해. 그런 거 다 필요 없어. 네가 행복해지는 게 내겐 제일 중요해."
하지만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런데, 내가 너에게 계속 짐이 되는 것 같아.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
며칠 후, 유진은 짐을 꾸리며 홀로 서울로 떠날 준비를 했다. 정민은 그녀를 배웅하러 나왔지만, 여전히 그녀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얼굴에 역력했다.
"유진아, 정말 괜찮겠어?" 정민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유진은 눈물을 머금고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난 엄마를 찾아야 해. 그리고 그건 내 몫이야."
정민은 말없이 그녀의 짐을 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역까지 함께 걸으며 평소처럼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았다.
기차가 플랫폼에 들어오자, 유진은 짐을 단단히 잡고 정민을 바라보았다.
"정민아, 정말 고마워. 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넌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정민은 입술을 깨물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혼자 너무 힘들면 꼭 연락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내가 갈게."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짐을 들고 기차에 올랐다. 기차가 출발하자, 유진은 창문 너머로 정민이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기차가 서울을 향해 달리는 동안, 유진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는 내가 정해야 할 때야. 어머니를 찾아서 내 과거와 마주하고,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할 거야.'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처럼, 유진의 마음도 복잡했지만 동시에 단단해지고 있었다.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유진은 작은 캐리어를 끌고 낯선 도시의 공기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혼잡한 역 안과 복잡한 거리의 소음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유진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부산을 떠나기 전, 유진은 할머니와 살던 집을 정리했다. 그 돈으로 서울에서 지낼만한 작은 원룸을 구할 수 있었다. 방 한 칸짜리 작은 공간이었지만 유진에게는 독립과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소중한 곳이었다.
처음 원룸에 도착한 날, 유진은 방 한가운데에 앉아 낡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벽지 곳곳이 헤졌고 창문은 작았지만, 그녀는 이곳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사실에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짐을 정리하며 할머니와 어머니의 물건을 소중히 꺼내 보았다. 어머니와 함께 찍은 오래된 사진 한 장과 메모들이 그녀의 가장 큰 보물이자 단서였다.
유진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인터넷 구직 사이트에서 고르고 고른 일은 근처 카페에서의 홀 서빙이었다. 첫 출근 날, 작은 앞치마를 두르고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유진을 매니저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열심히 배우면 금방 익숙해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유진은 서투르지만 성실하게 일을 배웠다. 손님이 많은 시간대에는 실수도 잦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이 끝난 후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작은 원룸에서 홀로 앉아 차분히 단서들을 복기하며 다음 단계를 계획했다.
낮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도서관이나 인터넷 카페에 가서 정보를 검색했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는 그녀에게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어느 날 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유진은 가로등 아래에서 멈춰 섰다. 어머니를 찾아 떠나온 길은 힘겹고 외로웠지만, 그녀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 길 끝에서 엄마를 만날 수 있을까?’
유진은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 그리고 과거와 마주하기 위해 자신을 다잡았다. 작고 허름한 원룸은 더 이상 외로운 공간이 아니라 그녀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곳이었다.
유진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어머니를 찾는 일이 더 이상 단순한 일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서울이라는 큰 도시에선 사람들이 수많은 꿈과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 속에서 어머니의 흔적을 찾는 일은 마치 바다에서 조개껍질 하나를 찾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유진은 기억의 조각들을 하나씩 되짚어가며 자신이 놓쳤던 중요한 단서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에서의 조용한 일상 속에서, 유진은 예기치 않게 중요한 대화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밤늦게까지 나누던 이야기. 유진은 그때 너무 어린 나이였기에 그 대화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때의 대화에서 중요했던 부분들이 하나둘씩 생각났다.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한 말, 그리고 아버지가 대답했던 말들이 유진의 기억 속에서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진애미가 용산엘 가든 영등포를 가든 내 알바 아니다. 장사를 할려거든 돈을 모르든 빌리든 너희들이 알아서 해! 난 그 여자,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아, 엄마!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요. 이 집 담보로 대출받아서 장사 시작하면 금방 목돈 마련할 수 있다구요."
그 순간, 유진은 그동안 자신이 놓쳤던 단서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용산'과 '영등포.‘
할머니와 아버지가 이야기했던 대화의 중심에는 어머니가 계실만한 곳과 당시 부모님이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가족이 어떻게 흔들렸는지가 모두 담겨 있었다.
유진은 서랍을 뒤져 오래된 앨범을 꺼냈다. 사진 속에는 할머니, 아버지, 그리고 낯선 여성의 모습이 있었다. 사진의 뒷면에는 아버지의 필체로 쓴 "2005년, 가족"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유진은 이 사진을 본 순간, 가슴속에서 억누를 수 없는 의문이 치밀어 올랐다.
"이 여자는 대체 누구지?"
그 순간, 유진은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진실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진과 대화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가족의 운명과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고, 다음 단계로 무엇을 해야 할지 유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사진의 여성을 찾아가는 것이 가족의 비밀을 밝힐 첫걸음일까, 아니면 또 다른 단서를 찾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