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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르미 Dec 22. 2024

2부  과거를 찾아서

포기 

유진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손끝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가웠다.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는데, 그중 하나라도 제대로 붙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텅 빈 거실 한 구석을 향하고 있었지만, 초점은 없었다.

“어머니와 외삼촌이...” 유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얽히고 섥혀 혼란스러웠다. 온몸이 떨렸고, 숨이 가빠졌다.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어머니만 사랑했던 아버지, 무관심했던 말투. 유진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혹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녀의 숨은 더 가빠졌고,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아니야, 아니야!" 유진은 스스로를 부정하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리가...” 그러나 그 말은 곧바로 가슴 속 깊은 의심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상상은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기에 더이상 입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었다.  

‘아니야, 그런 건 아닐 거야. 그랬으면 낮에 찾아갔을때 그렇게 무관심하지 않았겠지.' 

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억누르려 할수록 머릿속에서는 그 가능성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어머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유진은 벌떡 일어나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낸 뒤 잘 마시지도 못하는 맥주를 벌컥 벌컥 마셨다.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손톱으로 손바닥을 꽉 눌러 파고들었다.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것마저 현실을 깨닫게 하지 못했다. 그녀는 온갖 가능성을 하나씩 떠올리며 괴로움에 몸을 떨었다.

눈물이 고여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녀는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두 팔로 스스로를 감쌌다. 혼란과 의심, 고통이 뒤섞인 채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내가 누구지? 내가 사랑했던 가족은 대체 뭐였지? 모든 게 다 거짓이라면,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날 밤, 유진은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 가만히 눈을 감고 두 뺨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낼 뿐이었다.


유진은 밤새도록 뒤척였다. 잠들 수 없는 눈은 천장에 박혀 있었고,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눈을 감으려고 해도 무수한 생각들이 들이닥쳐 마음의 평온을 방해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한숨을 쉬며 스스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녀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밖에는 새벽빛이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거실로 나가 소파에 앉았다.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온몸은 피곤했지만 이상하게도 생각은 또렷했다.

유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쳐다봤다.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미 답을 정한 듯했다. 긴 한숨을 내쉬고 나서야 도훈의 번호를 눌렀다.

“여보세요?”
도훈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살짝 잠긴 듯했다. 그는 곧바로 그녀의 기분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챘다.
“유진 씨, 무슨 일 있어요?”

유진은 침묵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저, 도훈 씨.”
“응, 말해봐요. 무슨 일이든 괜찮으니까.”

그의 따뜻한 말투에 유진의 눈이 다시 뜨거워졌다. 그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저... 어머니 찾는 일, 그만두려고요.”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도훈은 당황한 듯했지만, 바로 그녀의 말을 따라가려 노력했다.
“왜 갑자기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어제 이야기 때문이에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가 보지 못한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제 더는 모르고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도훈 씨도 봤잖아요. 제가 얼마나 혼란스러워했는지.”

도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유진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기에 강하게 설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결정이 순간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라면,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 씨, 내가 말릴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이게 정말로 유진 씨를 위한 선택인지 한 번 더 생각해봐요.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게 정말 괜찮겠어요?”

유진은 도훈의 말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진실은 그녀가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울지도 몰랐다.

“고마워요, 도훈 씨. 그리고 미안해요.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줬는데...”
“유진 씨, 미안해하지 말아요.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든, 난 그걸 존중해요.”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한참 동안 거실 창밖을 바라봤다.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어딘가에서 조용히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모든 진실을 알지 못해도 괜찮아. 지금의 내가 무너지는 것보단 그게 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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