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붑니다.
달랏에 가을비가 촉촉이 내렸습니다. 아니 촉촉이 보다는 하늘이 뚫린 듯이 퍼부었습니다. 하루에 아침은 맑은 하늘로 시작하지만, 오후가 되면 슬금슬금 구름이 몰려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여우비처럼 내리다가 우르릉 쾅쾅 소리가 나고 곧 하늘에서 폭포가 쏟아집니다. 우기의 마무리가 이렇게 되나 봅니다.
이번 우기는 작년과는 또 달랐습니다. 너무 빨리 찾아온 우기는 비를 참 많이도 뿌려댔고, 태풍까지 두 차례 크게 오고 나서는 한동안 맑아서 ‘올해 우기는 참 빨리도 끝나는구나!’ 했는데 아닌가 봐요. 아직도 구름이 몰려다니는 걸 보면 아직은 우기는 우기인가 봅니다.
가을로 향하고 있는 달랏의 날씨가 좀더 쌀쌀해졌습니다. 낮에는 맑아서 제법 더웠다가도 곧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 고산지대 특유의 이랬다저랬다 날씨를 가진 곳이 달랏이니까요. 야시장 옆 달랏 꽃밭에는 라벤더들이 무럭무럭 자라 조금씩 보라색이 물들고 있습니다. 11월이 되면 온통 보라색이 가득하겠죠? 쌀쌀한 저녁 산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저는 허기가 집니다. 환타는 6시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이 넘어가면 제 무릎에 머리를 묻고 밥을 달라고 애교를 부리거나 제가 바쁜 것 같으면 공갈 껌을 물고 밥그릇 앞으로 가서 아작 아작 씹으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강아지 표정을 짓습니다. 그래서 환타는 매일 거의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산책하러 갑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이제 제 차례입니다.
쌀쌀한 바람이 불고, 뭔가 맛있는 것이 생각나는 날이면 저는 명란찌개를 끓입니다. 찌개 한 그릇이면 김치와 함께 밥 한 그릇을 뚝딱하게 되는 마법의 찌개입니다.
냉동실 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명란젓은 제가 한국에 갈 때마다 잔뜩 쟁여오는 저의 필수 식재료입니다. 염분이 적고 통통한 명란을 두 개씩 짝지어 소분해 얼려서 가져옵니다.
두 번째 주인공은 기름기가 적당한 돼지고기입니다. 급할 때는 대패 삼겹살을 이용하지만, 보통은 비계와 살코기가 반반으로 적당한 도톰한 삼겹살을 씁니다. 그리고 세 번째 주인공은 파채입니다. 다른 야채들도 들어가지만, 이 세 가지 주인공이 없다면 그날은 명란찌개를 먹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냄비 바닥에 명란젓 한쌍을 깔아줍니다. 저염 명란젓도 좋고, 양념이 되어있어도 좋습니다. 구하기 어려울 땐 통통한 명란젓 두 개 분량의 명란 파지를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통통통 썰어놓은 애호박과 무를 얹어줍니다. 이상하게 명란찌개에는 양파가 어울리지 않아서 보통 무와 애호박을 사용합니다. 그 위에 잘 썰어놓은 돼지고기 삼겹살을 켜켜이 올리고, 마지막으로 파채를 크게 두 주먹 올려줍니다. 달랏에서는 파채를 구하기가 힘들어 대파를 손가락 길이로 세로로 썰어 이용합니다. 큰 대파 한 대에서 두 대 정도 사용하면 적당합니다. 칼칼한 고춧가루 한 스푼 듬뿍 넣어주고, 적당량의 물을 넣은 뒤 바글바글 끓여줍니다. 좀 더 칼칼한 맛이 당긴다면 청양고추도 통통통 썰어 넣어 줍니다. 감칠맛을 위한 다시다를 조금만 넣어주고 간은 느억맘 소스로 대신합니다. 그렇게 한번 바르르 끓어오르면 명란찌개가 완성됩니다.
식탁에 매트를 깔고 김치와 갓 지은 밥을 가지런히 놓아둡니다. 찌개를 휘휘 저어 아래쪽에 있는 명란을 가위로 먹기 좋게 나누고, 작은 알들이 국물과 살짝 섞이게 합니다. 적당량에 돼지고기와 야채들을 소복이 담아주고 국물도 자작하게 담습니다. 좋아하는 방송이나 노래를 틀고 냄새를 맡고 옆에서 기웃대는 환타는 애써 무시하면서 식사를 시작합니다.
국물을 한 스푼 맛보고 밥을 한입 입에 넣습니다. 그리고 명란 한 조각, 돼지고기와 야채를 숟가락에 잔뜩 얹어서 한입 가득 우걱우걱 씹으면, 그저 행복합니다. 이렇게 맛있다니 저는 명란찌개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잘 끓이는 요리사입니다. 몇 개 남지 않은 명란젓을 보니 곧 한국에 방문해야 할 시간인가 봅니다. 달랏에서 먹어서 더 특별한 찌개입니다. 쌀쌀한 바람이 불면 늘 제 식탁에는 명란찌개가 자리합니다. 소박하게 준비해도 늘 푸짐한 맛을 보여주는 명란찌개가 저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