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장마가 끝나고, 맑게 갠 파란 하늘을 오랜만에 보았다. 장마가 끝난 뒤 보송보송함을 미처 즐길 세도 없이 푹푹 찌는 무더위가 기승이다. 그러나 베트남의 한 여름을 겪어본 나로서는 견딜만해서, 마른땅과 우산 없는 양 손이 감사하기만 하다.
오늘 오후에는 에어컨 바람을 쐬며 집에만 있자니 갑갑해져서 마스크를 끼고 챙이 넓은 모자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창 밖의 햇빛은 꽤나 강렬해 보였는데 막상 집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생각보다 선선하다. 마침 해가 구름에 살짝 가려진 찰나.
내가 향한 곳은 우리 집 근처, 넓은 들판. 어쩌다 보니 한국에 겨울에 들어와 봄, 여름을 나고 있는데 코로나로 인해 갈 곳은 없고 들판만 걷다 보니 어느 때보다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불과 몇 달 전 텅텅 비었던 논에 물을 대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가느다란 모를 심었는데, 어느새 짙은 초록의 벼가 우리 아이 키만큼이나 자라 있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사람이든 식물이든 성장하는 생명체를 지켜보는 건 기쁜 일이다. 왠지 기특하기도 하고, 작은 생물이 가진 생명력이 내게도 조금은 전해지는 것 같다.
이번 여름은 꽤 바쁘게 보냈다. 아이를 키우는 주부의 삶이 사실 바쁠 건 없는데, 이번 여름은 좀 그랬다. 하노이가 아니라 한국이라서 가능했던 일. 아직 한국에서 사회인으로 살았던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귀띔으로 계획에 없었던 시험에 응시하기도 했고, 누군가의 소개로 일을 하기도 했다.
내가 본 시험은 좁은 취업 문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는데 응시 접수를 할 때부터 확신이 없었다. 내가 합격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지만, 막상 정말 혹시라도 내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자신이 없었다. 자꾸만 주저하게 되는 나에게 남편은 질타가 섞인 응원을 쏟았고. 결국 시험을 치렀다. 끝내고 나니 속이 얼마나 후련하던지! 중학교의 딱딱한 책상에 앉아 시험지를 푸는데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이었다. 날 위해 무언가 도전하고, 결과를 떠나 어쨌든 한 과정을 마쳤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소모되어 괜한 일을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시험을 보고 나니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쉽지 않은 시간을 쪼개 도전한 나 자신이 기특할 정도.
시험 결과는 아직이고, 혹시 시험을 붙더라도 더 어려운 관문이 남아있지만 우선은 지금에 만족한다. 다시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책을 읽고 혼자 글을 쓰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쁜 여름을 보내고 나니 하루빨리 하노이의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져서 큰일이다. 그러나 코로나는 다시 기승이고, 하노이에는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이 불안정함은 언제쯤 끝이 날까.
초록 들판이 황금빛으로 물들 때쯤이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져야 할 텐데. 시간이 흘러 올여름을 뒤돌아 봤을 때, 나는 어떤 시간을 추억하게 될까. 여러 가지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나도 조금은 자랐다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고민은 여전히 계속되고 코로나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우울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 와중에 내가 조금은 성장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