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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igo Aug 28. 2020

'자격'에 대한 고찰

혼란한 세상 속 나만의 정답 찾기

나는 요새 '자격'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한다. 취업을 위한 수많은 자격증이 증명하듯 자격을 취득하는 것이 나의 존재의 필요조건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싸움의 시작은 대부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에게 그런 소리를 해!" 마음속에 미움이 쉽게 자리하는 이유도 "나도 그렇게 못하는데 쟤는 뭔데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거야!"라는 생각으로 시작된다. 질투와 미움은 실제로 내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보고 자란 나는 내가 행복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라는 생각을 자연스레 마음속에 늘 품고 살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의 경우 '아니다'로 끝났다. 나는 내 기대만큼 오늘을 열심히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순수하게 추구해도 되는가에 질문에도 혼란해했다. 내가 주위 어른들께 자주 듣고 자란 말은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 귀에는 그 말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다'처럼 들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잘하도록 나를 몰아붙였다. 내가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며 공부하고 있을 때 안심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은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을 남몰래 질투하고 미워하다가, 나의 그런 마음에 실망해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 죽을 용기로 열심히 살지!" TV 뉴스에서 자살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모님의 입을 통해 들은 얘기다. 안타까운 마음에 하던 말이겠지만, 어린 나의 귀에는 그 죽음의 선택조차 어떤 자격이 필요한 것처럼 들렸다. 실제로 내가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에 눈을 뜨던 삶의 순간에도 자발적 죽음의 방법에 나를 대입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내가 과연 죽을 만큼 힘든가. 그럴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나의 대답은 'No' 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내가 아닌 어떤 상황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죽임 당하기를 꿈꿨다. 기왕이면 운석 충돌로 한꺼번에 지구가 멸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내 죽음에 대한 어떤 비난도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비로소 죽어야만 나의 고통을 세상이 알아줄까라는 상상 속에서도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용기는 없었다.





"2020년 상반기." 누군가 나에게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 언제였나라고 물으면 듣게 될 대답이다. 그 시작점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 올랐는데, 그중 한 가지는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이었다. 부모의 자식으로 내가 태어났지만, 그 순간부터 경험하고 느끼는 생각과 선택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나의 것이다. 또한 나는 그 누구에게도 나를 낳아달라고 강요하지 않았기에, 오직 사회적 책임이라는 미명 하에 나를 옥죄는 것은 아무도 강요한 적 없는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다. 그때가 비로소 숨통의 틔인다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다. 나는 의무뿐만 아니라 권리(자격)도 있는 사람임을 체감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가슴이 뛰는 삶을 살았는데.. 요즘 또다시 내 마음속에 이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한다.



1. [최근 6개월 동안 행복했던 나의 생각]

나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보다 삶의 의미를 좇는 것이 더 행복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의미 있는 삶을 위해 남들에게 더 많이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열정을 다해 살고 싶다. 가슴이 뛰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 가슴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겪을 고통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깨달은 것을 나누며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같이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고통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


2. [혼란한 요즘 다시 고개를 드는 생각]

세상엔 불행한 사람이 정말 많다. 다들 현실을 고통 속에 살아간다. 내가 혼자 이 불행을 탈출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다시 사람들을 아프게 하진 않을까. 내 밝음이 그들에게 빛이 아닌 새로운 그림자를 드리우진 않을까. 사람들이 나에게로부터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은 그들과 함께 불행한 나일까, 희망을 주는 나일까.




얼마 전 인터넷에서 떠도는 각 나라의 위로 법에 대한 유머글을 읽은 적이 있다.

출처 : 더쿠, https://theqoo.net/index.php?mid=square&document_srl=1540575408



한국의 '시X 나도..'를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과거의 모습이 겹쳤기 때문이다. 나는 밝은 사람들을 보는 것이 편치 않았다. 내가 '감히' 못하는 길을 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끊임없이 나와 그런 사람들을 비교하며 뒤틀린 나를 합리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나는 남이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라는 비논리로는 나 자신조차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불행에 맞장구를 쳐주는 친구의 '시X 나도.. ''아니야, 너는 할 수 있어!'보다 더 사랑했다. 나와 같이 고통을 겪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다.



오늘 우연히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에듀테이너 '아란'님의 강연을 보게 되었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와 가진 것을 나누는 삶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 나누는 삶에 대한 행복을 알기에 크게 동의했다. 하지만 꼬리처럼 따라붙는 이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런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선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 바를 알고 그것을 남의 행복을 위해서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내가 남을 이기는 경험이 선행되어야 한다. 내가 더 강자일 경우에 의미 있는 삶은 더 자연스럽게 따라오기 때문이다. '조던 피터슨'의 [12가지 인생의 법칙]이라는 책의 초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영역 싸움에서 승리한 바닷가재는 패배한 바닷가재보다 행복 호르몬인 세로토닌의 분비가 활발하다.  






세상은 너무나 당연하게 불평등하다. 왜냐하면 존재한 이래 단 한 번도 평등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나만의 무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돈이 되었던, 마음이 되었든, 지식이 되었든, 지혜가 되었든 남들보다 많아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체가, 내가 의미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자체가 내가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의 합리화가 아닐까.



'데일 카네기'는 그의 책, [인간관계론]에서 '인간은 누구나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그 중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내가 남들에게 더 가치 있고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타인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남의 문제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혼란한 이유는 이 모든 '의미 있는 삶'의 논거 자체가 '문제가 존재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필연적으로 '문제가 존재해야 함'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추구하는 삶은 과연 '의미 있는 삶'인가, '문제가 존재해야만 하는 삶'일까..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의미 있는 삶이 존재할 수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수많은 문제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또한, 이 모든 문제는 결코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 나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며, 내가 중요한 사람인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이 세상에 문제는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인생이 이렇게 아이러니  수가 없다.



또 다른 의구심은 모든 인간의 행복을 바라는 내 이 마음과 행동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것은 같은 것일지라도 개인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상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만약 내가 더 행복하다면 필연적으로 덜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다 강자로서 존재해야 한다. 그런 이상적인 사회를 위해 내가 하는 행동(=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삶, 의미 있는 삶)은 한편으로 또 다른 강자가 되길 선택한 삶이기 때문에, 결국 필연적으로 상대적 약자를 낳을 수밖에 없다. 내가 추구하는 삶을 위해 내가 원치 않는 것이 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니 어느새 어느 것이 내가 최초에 추구하고자 했던 '올바른 삶'인가에 대해서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 글의 처음에서 '자격'에 대해 이야기 한 점도 그런 것이다. '내가 감히 이렇게 글을 쓰고 나눌 수 있는 존재인가.'라는 생각이 요새 자꾸 마음속에 슬금슬금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겠다는 나의 욕망을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직 이 아이러니에 대한 나만의 정답을 찾진 못했지만, '가치'와 '분야의 다양성'에서 어쩌면 해답을 찾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 '용기', '존중'이 주는 가치는 내가 행복을 추구하는 만큼 타인의 행복 추구를 존중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또한, 세상에는 다양한 분야가 존재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패션, 의료 등. 또 그 각 분야 안에도 각기 다른 일들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포지셔닝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가가 모두를 위한 해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역사 속 종교 전쟁또다시 나를 혼란에 빠뜨린다. 혼란한 세상 속 혼란한 글이었다. 오늘 밤 꿈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난다면 묻고 싶다. 배부른 아테네 사람들의 게으름을 일깨우는 등에를 자처하던 그가, 만약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세상의 모든 탐욕을 해결할지, 아니면 의미 있는 모두의 삶을 위해 그 혼란한 세상을 다시 유지할지.



내일은 또 다른 혜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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