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쏟아지는 오늘, 정오 즈음인가였다. 루퍼트의 검사 결과를 듣고 면회를 갔다가 작업실로 향하던 길이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우산을 쓰기엔 애매하여 그냥 걸었다. 옷깃이 살짝 젖어도 서럽지 않았던 이유는 의사가 전해 준 좋은 소식 때문인지도 모른다. 루퍼트는 폐렴을 잘 이겨내고 있다는 말, 며칠 지켜보고 유지가 되면 퇴원할 수 있다는 말에 기분이 너무 좋았다. 실제로 루퍼트도 컨디션이 회복된 듯해 보였다. 눈빛이 다시 또릿또릿 하고, 장난도 칠 줄 알았다. 유월은 병오월, 내 사주에 있는 자수와 충이 되어 6월 내내 늘 우울했지만 오늘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오랜만에 작업이라도 시작할까 하고 내 작업실로 향하다가, 따뜻한 국수 한 그릇 점심식사로 하고 들어가고픈 마음이 생겼다. 이사 오고 나서 눈여겨봤던 화려한 외관의 베트남 식당이 바로 눈에 띄었다. 마침 꽤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듯했다. 인터넷 검색도 미리 마쳤겠다, 이곳은 맛집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들어갔다. 인테리어가 꽤나 그럴싸 한 곳이었고 마치 하노이나 사이공에서 외국 관광객 위주로 장사하는, 현지보다 조금은 더 비싼 곳 같은 분위기의 카페였다. 이 집 주 메뉴인 쌀국수와 반미 둘 중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오늘은 날이 쌀쌀하기도 하고 하여 쌀국수를 청했다.
주방에서는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났다. 마치 라면이라도 끓일 때 취하는 제스처에서 나올법한 그런 소리였다.
주문한 국수가 나왔을 땐 내가 들은 소리는 지금 내가 받은 결과물의 과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9900원짜리 쌀국수는 뜨거운 물을 붓고 삼분 기다렸다가 먹는 인스턴트 라면 쌀국수였던 것이다. 이 쌀국수에는 레몬도 숙주도, 고기 한점도 올라가 있지 않았다. 대신 쌀국수 라면에 같이 들어간 파와 식물성대체육 플레이크가 그릇 위에서 둥둥 떠다녔다.
이 국수의 맛은 뻔하디 뻔하다. 딱히 싫어하진 않지만 아쉬운 맛. 어쩌다 집에서 먹는 베트남 라면의 맛. 집에서 먹어도 레몬즙은 뿌려먹는데 말이다. 이 메뉴가 육수가 늘 끓고 있어야 하는 주방 환경을 만들 수가 없어 내린 비즈니스적 결정이었다 해도 9900원이라는 가격에는 동의할 수도 존중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떠한 말을 하지 않고, 예의상 몇 젓가락만 먹고 모두 남기고 나왔다. 음식이 아까웠지만 눈치가 있다면 알아 들었겠지- 양심 어디다 팔아먹었수.
그래도 나의 운은 모두 루퍼트에게로 몰렸다고 생각하고, 이깟 한 끼 식사에 분개하지 말자. 루루가 좋아지고 있는 게 어디야, 쌀국수에 숙주와 고기 한 점 안 올라갔다고 화낼 일은 아니지. 신에게 염치가 있지, 늘 운이 좋을 수는 없잖아. 작업실에서 깔깔깔! 소리 내어 웃다가, 오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비중이 0.03퍼센트에서 0.04로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다가.
어느 지역의 고기 맛집을 소개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을 보다 그놈의 고기를 먹기 위해 낭비되는 물과 에너지가 아까워 개탄하다, 오늘 점심에 먹었던 쌀국수는 언젠가 세계적 재난의 시대에 유일히 먹을 수 있는 미식이 될 수도 있는 날을 상상해 보다가.
캄브리아기 지구대재난 때의 온난화가 지금 지구환경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공기 중 짙은 농도의 이산화탄소와 숨 막히는 열기를 들이켜는 상상도 해 보다가 두 번째 루퍼트 면회시간이 다가왔다. 오늘 밤도 나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부디 잘 있다가 내일 아침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고 당부하고 집으로 오는 길,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쌀쌀했던 밤공기가 더워졌음을 감지했고.
지구온난화로 날씨가 오락가락하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환경 지키는 것은 아직 할 필요가 없다 말하는 사람들이 그저 미울 뿐이고.
고기 말고 채식하자 권하는 것은 여전히 유난 떠는 것뿐인 이 세상이 오늘따라 밉다. 자오충이 끝나는 7월은 좀 미운 마음이 사라지려나, 나는 잘 모르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