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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ism Oct 16. 2024

서울대를 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그 땐 그랬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이었다. 


엄마는 어디에선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가서 의외로 예체능 과목 음악, 미술, 체육 때문에 전교 1등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셨다. 전과목 평균으로 전교 석차를 내던 시절이었으니 실제 그런 경우가 많았을 법했다. 그 억울한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듯, 엄마는 당장 대책마련에 나섰다.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도, 성가대원도 하는 딸이니 음악에서 점수가 깎일 일은 없을 것 같고, 체육도 뭐 학교 수행평가 만점을 못 받을 만큼 몸치는 아니라 생각했지만, 딱 한 가지 미술이 맘에 걸렸다. 내딸이 그림은 좀 못 그리지...싶으셨달까.... 그렇담 미술학원을 보내야겠다 생각했다. 심지어 기왕하는 거 화끈하게, 얜 공부할 아이인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미술을 배우겠냐며 짧은만큼 진하게 하자며 나를 예고 준비 입시반에 넣으셨다.(대단한 우리 엄마...!) 일반계 고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하기 위해 하루에 12시간씩 그림만 그리는 미술 특훈을 시작한 아이러니였다.


초등학생 때도 미술학원 근처도 안 가봤던 아이가 갑자기 데생을 배우고 석고상을 그리다보니 2개월은 쏜살같이 지나갔고 입학이 다가왔다. 이제 인생에 다시 없을 미술 특훈이 끝나야 할 시기, 엄마는 솔깃한 말을 듣게 된다. “어머님, 2달만에 그림 실력이 이만큼 느는 학생은 없습니다. 얘는 미술에 소질이 있어요.” 여기서 멈췄다면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며 “우리 애가 다 잘해요” 하고 끝났을 게 분명한데, 문제는 그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단 것이다.


 얘처럼 공부 잘 하는 아이가
그림을 조금만 잘 그리면
서울대 미대를 그냥 갑니다.



아......이건 분명 듣지 말았어야 할 문장이었다. 서울대라니! 대한민국에서 자식 키우는 부모가 쉽게 흘려보낼 수 있는 단어가 아니었다. 서울대를 ‘그냥’ 간다고? 엄마는 갑자기 웬 미대냐며 펄쩍 뛰는 아빠를 설득했다. 뭐라고 설득했을까. 우리 딸이 그냥 공부로 서울대 가기엔 좀 어렵지 않을까? 하고 말했으려나. 서울대를 이길 수 있는 다른 명분이 별로 없었다. 


대학이, 입시가, 전부인 시절이었고, 그런 시절에 그 시기를 살아가야 하는 학생으로서, 부모로서, 우리는 ‘서울대를 그냥 간다’를 들은 이상 다른 길을 갈래야 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미대입시 준비생으로서의 고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공부로 대학을 가려하는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런 인문계고에 차석 입학을 한 학생이 공부가 아니라 쌩뚱 맞게 미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시 누구에게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어서 담임 선생님도 “얘를 왜 미술을 시키냐”며 의아해했지만, 온몸으로 의아함을 표현하는 선생님을 납득시키는 것도 3글자면 되었다. 서.울.대.


그래서 서울대생이 되었냐고? 아니. 1.1.1.1. 올 1등급. 서울대에 가고도 남을 수능 성적(예체능계열은 수능을 따로 보던 때)이었으나, 미대는 성적으로 가는 곳이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니 당연히 서울대 홍대 국민대, 최고의 대학들에 원서를 넣을 수 있었지만 실기장에서 심사 받는 내 그림엔 나의 성적이 적혀있지 않았다. 수준 높은 대학에 원서를 쓸 수 있는지와 그림으로 합격할 수 있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결국 실기력이 부족했던 나는 서울대는 물론, 원서를 쓴 모든 미술 대학들에서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어찌보면 예견된 일이었다. 2달 만에 실력이 많이 늘었다던 미술에 소질 있다던 학생은 사실 사는 내내 그 흔한 낙서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아이였다. 미술학원에 문 열고 들어가던 이유가 “그림을 못 그려서” 였다는 걸 냉정하게 떠올리기만 했더라도 3년을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을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도 말이 안 되는 일이건만 그때는 그저 “서울대”에 가려져 모두가 사리분별이 안 되었다. 그만큼 입시가 중요했던 시절이었다. 전교 1등에 목을 매 미술학원 입시반을 다님으로써 입학을 준비하려 한 것도 사실은 입시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결국 대학에 잘 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는 당연한 관문이라 모두가 믿던 시절이었다. 그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던, 그러니까 서울대에 가려고 갑자기 미술을 시작하는 것도 다 이해가 되던 시절이었다. 


진짜로 고등학생에겐 입시가 지상목표였다. 그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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