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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Jan 13. 2024

과연 우리는 다시...

이주영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

졸업 시즌이다. 아들 녀석이 벌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간단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뀐 것이 96년이었고 내가 바로 그 해 2월에 졸업을 했었는데 6년 내내 다닌 국민학교의 졸업앨범에 초등학교라고 인쇄되어 있어서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난다. 그게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지난주 졸업식 때 찍은 사진 속에서 엄마보다 더 큰 아들의 모습이 꽤나 새삼스럽다. 아들은 다행히도 집에서 제일 가까운 중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중학교 입학은 12년 남짓한 아들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아들은 이제 더 이상 어린이가 아닌 청소년이고, 중학교 입학이 그 시작점이 될 터이다.


졸업 시즌은 비단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인력 충원이 필요한 다수의 직장은 졸업 시즌을 노려 새로운 인력을 뽑게 된다. 병원이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의사직 역시 3월에 가장 이직을 많이 한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학생은 3월부터 인턴이 되고, 인턴은 전공의가 되고, 수련이 끝난 전공의는 전임의가 되며, 전임의까지 마친 새로운 전문 인력들이 대학에 남기도 하고 2차 병원에 취업을 하거나 혹은 개원을 하기도 하니, 맞물려 돌아가는 이직의 흐름은 졸업 시즌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나는 2월 25일에 의과대학 졸업식을 하고, 그날부터 바로 인턴 보조인력으로 투입되어 업무를 인계받기 시작했었다.) 그 말인즉슨, 3월부터 함께 일할 인재를 적절히 끌어오지 못하면 이듬해 3월까지는 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병원 대장항문외과는 올해도 전임의를 뽑지 못했다.


대장항문외과는 분과의 특성상 응급수술이 많다. 매년 우리 병원 외과 응급수술의 60% 가량을 우리 분과에서 담당하고, 일이 그만큼 많은 것은 당연지사다. 외과 전공의라면 누구라도 바이탈을 다루고 싶다는 열망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기에 외과로 진로를 선택했겠지만, 그렇게 '일차적으로 걸러진' 외과 전공의들 사이에서도 대장항문외과는 기피과로 인식되어 있다. 몇 년 전 우리 분과 교수님 한 분이 해외 연수를 가셨을 때 내가 1년 365일 내내 당직을 선 적이 있었는데 우리 분과로 오는 모든 응급 환자는 내가 맡아서 해결했었다. 연이어 며칠 동안 응급수술이 이어지던 어느 날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수술방에 앉아 있던 나에게 우리 팀 2년차 전공의가 말했다. 

"저는 우리 병원에서 제가 제일 힘든 줄 알았는데, 교수님을 이기지는 못하겠네요."

그때는 웃어넘겼는데, 그 이후로 새로운 전임의를 한 명도 뽑지 못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롤모델이 되어 주어야 할 내가 '나는 저렇게는 못 살겠다'는 인식을 심어 주고 있으니, 무슨 수로 새로운 인력을 데려 오겠는가.


지난 1년간 대장항문외과와 내분비외과를 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3년차 전공의가 결국 내분비외과를 선택하면서 희대의 명언을 남겼다.

'연애는 대장항문외과와 하고 싶은데, 그래도 결혼은 내분비외과와 해야겠어요.'

그렇게 나는 또 전임의 없는 1년을 보내게 될 예정이다.




나는 해외로 나갈 때면 으레 책을 한두 권씩 들고 가는데, 이번 겨울 일본 여행은 아이들과 함께하니 여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왕복 비행기에서만 가벼이 읽을 요량으로 에세이집을 하나 들고 갔다. 페이스북 친구이자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 소아응급실에서 일하고 계시는 이주영 선생님께서 쓰신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책이다. 저자의 유려한 글솜씨는 이미 페이스북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활자화된 책으로 읽으니 새삼 굉장했다. 의사들이 쓴 여느 수필집(대표적으로 <메스를 손에 든 자>라는 졸작이 있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한 편의 문학 작품을 읽는 느낌이었다. 


"돌아오지 않겠다는 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아이를 오래 지켜본 의사들은 그 순간을 동시에 느낀다. 상한 아이의 몸이 더 이상 다치지 않고, 영원히 아쉬울 부모의 마음도 다치지 않을 정도의 초라한 심폐소생술.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간은 특별히 더 천천히 흐른다. 누군가는 비현실적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또 누군가의 눈에 비친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느리며,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오열과 거짓말 같은 고요가 공존하는 순간."

- 이주영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 중에서


심폐소생술을 하는 순간을 이보다도 더 극적으로 담아낼 수 있을까. 감탄과 경이, 그리고 질투심을 함께 불러일으키는 문장들이다.


하지만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손에 들 책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비행기를 타고 책을 펼친 이후에야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에세이집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아이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저자가 분노와 절망을 꾹꾹 눌러 담아 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우리나라 의료를 향한 간절한 외침이었다. 저자는 이 책이 출판되고 난 후 순천향대학교 천안병원 소아응급의료센터 전문의가 5명이나 줄줄이 사직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응급센터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바이탈뽕에 취해 스스로 선택한 이 길이 날이 갈수록 험난해지는 상황에서, 무너져 가는 필수 의료를 떠받치고 있는 우리는 언제까지 이 일을 지속할 수 있을까. 전문가를 향한 최소한의 대우와 존중만 있어도 알아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게 될 그들이 가장 치열해야 할 필수 의료 현장을 떠나고 있다. 환자는 의사를 의심하고, 국가는 의사를 벌하고, 국민들은 의사를 비난하는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지원하는 전공의들이 사라지고 있다. 정확히 5년째, 간격이 고른 계단처럼 착착 줄어드는 전공의 숫자는 똑같은 숫자로 착착 줄어드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의 예고편이다. 아이의 혈색, 숨소리, 목소리 하나로도 위험을 잡아낼 수 있도록 수년에 걸쳐 이미 충분히 훈련된 전문의들마저 소아청소년과 진료 현장을 떠난다. 경험의 축적과 전수가 사라지는 소아청소년과, 노인이 사라지는 바다.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

- 이주영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 중에서


소아청소년과의 현실이 대장항문외과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과연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기는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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