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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ro Aug 12. 2024

진보 혹은 독단

케이트 메스너 - <소리 높여 챌린지>

파리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개인적으로는 야구도 없고 축구는 참가도 못한 아쉬운 올림픽이었지만 그래도 꽤나 재미있었다. 금메달을 많이 땄으니 더 그랬겠지. 올림픽 무용론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지만 4년을 땀을 흘린 선수들의 열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이벤트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이룰 것이 없어 보이는 조코비치나 올해에만 PGA 투어 6승을 따낸 스코티 셰플러 같은 선수들도 금메달을 따내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나라를 대표한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의미인 것 같다.


이번 올림픽은 다른 의미에서 기억에 오래 남게 될 것 같다. 일단 개막식부터 역대 이렇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니까. 하지만 전 세계인이 보는 축제의 장에서 꼭 PC주의를 내세웠어야 하냐는 반발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분명히 누군가는, 아니 상당수가 불편해할 것을 알면서도 개막식에서 성소수자를 전면에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프랑스니까 가능했다. 친환경 올림픽이라는 이름으로 에어컨을 없애 버린 것도, 탄소중립을 내세워 채식 위주의 식단을 마련한 것도 프랑스였기 때문에 시도할 수 있었으리라. 다른 어느 나라도 감히 시도해 볼 수 없었을 과감한 시도를 한 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굳이 TV로 개막식을 지켜보는 다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해 가면서,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컨디션을 저하시킬 우려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와 '옳음'을 강요해야만 했을까?





여름 방학을 맞아, 중학생이 된 아들 녀석이 키만 클 것이 아니라 마음도 좀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두어 권 빌려다 주었다. 그중 하나가 케이트 메스너의 <소리 높여 챌린지>이다. 


굉장히 잘 써진 소설이다. 트라우마를 극복해 내는 용기, 청소년을 대상으로 은밀하게 행해지는 성희롱,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차별, 탄소중립을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는 식용 곤충 등을 미스터리를 가미한 성장 소설로 근사하게 엮어냈다. 청소년기에 겪을 만한 일들을 이렇게 짜임새 있게 구성해 낼 수 있는 작가의 필력에 박수를 보내 주고 싶다. 중고등학생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해 줄 만하다. 


"귀뚜라미가 울었다. 수컷 귀뚜라미만이. 미아는 울지 않고 있을 모든 암컷 귀뚜라미에게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 너희도 소리를 내란 말이야!"

"우리 용감한 여자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거야. 그냥 계속 나아가는 거. 우리한테 일어난 일을 괴로워하고 슬퍼하면서도, 계속 세상도 구하고 사업도 운영하고 재판도 하고 가족도 꾸려 나가고 그러는 거."

- <소리 높여 챌린지> 중에서


작가는 주인공 미아와 미아의 어머니, 할머니의 입을 통하여 여성의 사회 참여와 권리 신장을 역설함과 동시에 차별과 폭력을 감추지 말고 드러내는 용기를 가지도록 독자들을 설득한다. 또한 작가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물 흐르듯이 이야기에 녹여냈다. 미아의 친구는 '어머니들'과 함께 살고 있고 할머니 농장의 직원 대니얼은 '남편'이 있는데 등장인물 누구도 이것에 대해 놀라거나 신기해하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대로라면 이 소설을 읽는 청소년들은 자연스럽게 성소수자를 받아들이고 기후 위기를 가져오는 소고기의 대안으로 곤충을 단백질 공급원으로 이용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아주 영리하다. 


다만 아직 중학교 1학년인 아들 녀석이 이 소설을 얼마만큼 이해하고 적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원체 순수한 뇌를 가진 아이이다 보니 보고 듣고 읽은 것을 그대로 백 퍼센트 옳다고 믿어 버리는 경향이 강해 걱정이 앞선다. 청소년기는 평생을 가지고 갈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인데 근래 출판되는 어린이/청소년 도서들은 교양도서와 소설을 막론하고 죄다 PC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보니, 한쪽으로 치우친 이념의 주입이 자칫 극단으로 흐르지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점점 심해져만 가는 '한남'과 '꼴페미' 사이의 성별 갈등이 분명 '건강한 페미니즘'의 모습은 아니지 않은가.




<82년생 김지영> 이후부터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겠지만, <82년생 김지영>이 메가 히트한 이후 어느 즈음부터 우리 문단은 분명 페미니즘과 퀴어 문학이 주된 흐름이 되었다. 최근 무슨무슨 문학상 수상작품집 이런 책들을 보면 대세를 따라야만 이런 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때로는 퀴어 문학작품을 읽다가 이따금씩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페미니즘이나 동성애가 나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박상영 작가의 팬이고 PC주의의 방향성 자체는 옳다고 생각한다. 단지 목소리가 한쪽으로만 치우치고 '옳은 말만 해야' 하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되면 오히려 다양한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워질 것이 우려가 된다는 것이다. 


르네 피스터는 <잘못된 단어>에서 정치적 올바름에 사로잡혀 '옳음'을 강요하는 독단적 좌파들에 의해 오히려 다수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침묵하게 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음을 서술한 바 있다. 지나치게 옳은 것만 강요하는 세상 역시 다양성을 잃는다. 그런 의미에서 파리 올림픽은 진보와 독단의 경계선상에 있었다. 친환경 올림픽을 내세울 목적으로 에어컨을 없애는 것이 과연 선수들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시키는 것보다 앞서는 가치였을까? 강요된 PC주의는 오히려 PC주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반발심만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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