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단에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는 과정을 문진이라고 한다. 어디가 불편한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다른 증상은 없는지, 기저질환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등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정보들이 많지만, 가족력 역시 환자를 진료할 때 꼭 물어보아야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주로 암환자를 진료하기 때문에 환자의 가족 중에 암을 진단받은 사람이 있는지가 더욱 중요한데, 유전성 대장암인지 여부에 따라 치료가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50세가 되지 않은 젊은 나이의 환자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바쁜 외래 진료 중에 가족력을 꼼꼼하게 물어본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부모나 형제의 병력도 모르는 환자들이 허다한데 하물며 조부모와 삼촌, 외삼촌, 이모, 고모의 암병력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환자는 많지 않다. ‘암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부터 시작해서 ‘자궁인가 어디를 수술받으셨는데 왜 받으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래전에 돌아가셨는데 암이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용종인가로 시술인지 수술인지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암이냐’ 등등으로 이어지는 불확실의 궤도에 올라타게 되면 가족력을 확인하는 데에만 몇 분씩 걸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환자를 막론하고 배우자의 병력을 모르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그러다 보니 때때로 가족력을 물어보면 배우자의 암병력을 읊는 환자들이 있다. 환자의 입장에서야 가장 가까운 가족의 이야기를 한 것이겠으나 사실 내 질문의 의도가 그것은 아니었음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피를 나눈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남편의 결장암이 아내에게로, 아내의 직장암이 남편에게로 유전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드물게 부부가 모두 대장암으로 진단받은 환자들을 만날 때면, 나는 짠한 마음이 드는 와중에도 이들이야말로 부부는 일심동체의 살아 있는 증거가 아닌가라는 열없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한 남자가 아내와 함께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얼마 전 직장암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하필이면 항문 바로 안쪽에 직장암이 생기는 바람에 도저히 항문을 살릴 방법이 없어서 항암방사선치료 후에 항문을 포함하여 종양을 완전히 제거하고 좌측 복벽에 영구 장루(변주머니)를 만드는 복회음절제술을 시행했었다. 수술 이후 특별한 문제없이 회복했고 항암치료를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다. 종양내과에서 시행하는 항암치료가 끝날 때까지는 내 외래에 올 이유가 없는데 대기자 명단에도 없던 환자가 갑자기 방문했다. 예정되지 않은 외래를 갑자기 내원하는 환자들을 만날 때면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가 하고 으레 긴장하게 된다.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어디가 불편하세요?”
“아니요, 교수님께서 수술을 얼마나 잘해 주셨는데 그럴 리가요.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게 아니고 사실은요…”
옆에서 쭈뼛거리고 있던 환자의 아내가 머뭇거리며 소견서를 내밀었다. 수술 전후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 남편을 살뜰히 챙기던 아내였다. 나는 직장암으로 의뢰드린다는 내용이 적힌 소견서를 받아 들고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아 잠시 어리둥절했다. 직장암 수술을 받고 이제 겨우 회복해서 항암치료 중인 환자가 다시 직장암이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전자차트를 다시 확인했더니, 아뿔싸, 그게 아니었다. 대기 명단에 떠 있는 환자는 오늘이 외래 첫 방문인 58세 여자였다.
“남편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오늘은 제가 환자예요.”
그 말을 꺼내고 나서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는지 아내는 피식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십여 년 외래 진료를 보면서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우리나라 국민 세 명 중 한 명은 평생 한 번은 암에 걸린다지만 부부가 불과 4개월의 시간차를 두고 모두 직장암을 진단받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이것을 얄궂은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천생연분이라며 위안이라도 삼아야 할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진행성 직장암이에요. 간이나 폐 등 다른 장기에 전이는 없고, 남편분과 마찬가지로 항암방사선치료를 먼저 하고 수술을 계획할 거예요.”
이미 한 번 경험이 있는 부부는 자세한 설명 없이도 치료 과정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아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도 남편처럼 평생 장루를 차야 할까요?”
아내의 직장에 생긴 암덩어리는 항문과 아주 가깝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항문은 살릴 수 있을 거라는, 수술 후 당분간은 소장으로 만든 장루를 유지할 계획이지만 몇 달 후에 복원 수술을 다시 할 거라는 내 말에 아내는 그제야 굳은 얼굴을 펴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항문이라도 살릴 수 있는 게 어디냐며 다행이라고 위로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 나는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건 옆에 서 있던 남편에게는 당신은 고작 그 정도의 다행도 얻지 못하고 영구적으로 장루를 가지게 되었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저희 부부는 교수님께서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진료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남편이 말했다. 나는 걱정하지 말고 항암방사선치료 잘 받고 오시라고 했고, 아내는 교수님만 믿겠다면서 진료실을 나섰다.
하지만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아내의 수술은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이들 부부가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의과대학 정원 증원이 발표되었고, 우리 병원을 포함한 전국의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전공의 없이 대학병원이 정상적으로 굴러가기는 힘들었다. 예정되어 있던 수술들이 차례로 밀릴 수밖에 없었고, 일정이 두 번 연기되자 아내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겠다며 수술을 취소해 버렸다.
환자와 의사는 서로를 믿어야 한다. 그것이 치료의 시작이자 기본 전제이다. 하물며 환자의 몸에 칼을 대야 하는 외과 의사라면 더더욱 환자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환자의 신뢰를 깨뜨려 버렸다. 남편의 몸은 물론 자신의 몸까지 내맡기려 한 환자의 철석 같은 믿음을 저버렸다. 비록 그것이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지라도, 나는 환자의 신뢰를 내가 무너뜨려버렸다는 사실을 견디기 힘들었다. 곪아서 터져 버린 시스템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를 개인이 당장 해결하기란 불가능했고, 내가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신뢰 관계가 무너져버리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나는 무력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환자와의 신뢰를 무너뜨려 가면서 병원을 지키는 것이 옳은 일인지 고민하느라 밤잠 이루지 못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몇 달이 지나고 항암치료를 마친 남편이 이번에도 아내와 함께 외래에 방문했다. 특별한 부작용 없이 항암치료를 마쳤고 추적검사에서도 재발이 없어 남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사실 나는 남편의 안녕보다도 아내가 더 궁금했다. 남편의 상태를 살피고 앞으로의 추적 관찰 계획을 설명한 후, 나는 짐짓 무심한 척 아내에게 물었다.
“수술은 받으셨어요?”
아내는 멋쩍게 웃으며 근처 다른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노라고 말했다. 나를 믿고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한 표정이었다. 더 늦지 않게 수술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이제 곧 항암치료 시작하시게 될 건데 잘 버텨내 보자고, 남편과 같이 한 번 겪어 보았으니 더 수월할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이래저래 힘드실 텐데 병원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남편 계속 잘 부탁드려요.”
자식과도 같은 전공의들이 사직서를 내고 나가 버린 마당에 동참하지는 못할 망정 병원에 남아 꾸역꾸역 수술을 하고 있는 것이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인지는 둘째로 치더라도, 책임져 드리겠다던 약속조차 지키지 못한 내가 무슨 자격으로 감사의 인사를 받을 수 있을까. 부끄럽고 민망함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때로는 환자로 때로는 보호자로 지난 수개월을 병원을 드나들며 살았을 부부의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애틋했다. 손을 꼭 쥐고 진료실을 나서는 부부의 뒷모습에서 서로 의지하며 병을 이겨내겠다는 굳은 다짐이 느껴져 다행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비록 내가 책임져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지만 부디 아무 일 없이 두 사람 모두 완치되기를, 더불어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 관계가 무너져 가는 작금의 사태가 하루속히 해결되기를 가슴 깊이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