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ro Nov 12. 2024

쓰는 사람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면 문학도도 아니면서 괜스레 설렌다. 나도 의사들만 응모가 가능한 수필문학상에서 몇 번 수상한 뒤 우쭐한 마음에 지역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응모했다가 보기 좋게 낙방한 흑역사가 있다. 그러고 나서야 이건 소설을 본격적으로 배운 사람들이 응모하는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음을 접긴 했지만 고이 접어둔 마음이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아서 이 계절만 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접어 둔 마음이 펼쳐지면서 이번에도 어디 한 번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신춘문예 공고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대곤 하는 것이었다. 메일로 접수가 가능하다면 아마 벌써 몇 번은 접수했을 것인데 이놈의 신춘문예라는 것이 인쇄해서 우편으로 접수하는 구닥다리 방식을 고수하고 있어서 우체국을 가야 하는 귀찮음에 더 이상은 응모를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몇 푼 안 되나마 우표 값을 아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십여 년 간 줄곧 나는 쓰는 사람이었다. 쓴다는 것은 나의 정체성의 일부였다. 수십 편의 논문을 썼고, 수백 편의 에세이를 썼다. 그러다가 운이 좋아서 지난해에는 책도 한 권 내게 되었다. 물론 잘 팔리지는 않았지만, 애당초 팔리기를 기대하고 만든 책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거짓말이다. 큰 기대는 안 했지만 혹시나 대박이 나서 너무 유명해지면 어쩌나, 그러면 다른 건 몰라도 유퀴즈는 꼭 나가야지 하는 쓸데없는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1쇄도 채 다 팔지 못한 입장에서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출판사 대표님께 죄송할 따름이다.


지난 일 년간 나는 쓰기를 멈추었다.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한 백 배쯤 과장해서 표현해 보자면,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을 부끄러워했던' 윤동주 시인의 마음이 꼭 내 마음과 같았다. 우리나라 의료는 끝을 알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고 피붙이 같은 내 제자들이 사직서를 내고 갈 곳을 잃고 떠돌고 있는 마당에,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며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사직서를 던지고 떠나는 결기를 보이지는 못할망정 한가로이 수필 나부랭이나 끄적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밀려드는 암환자들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은 그저 핑계였고, 나는 그저 비겁했을 뿐이었다. 후배들에게, 제자들에게, 나는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회진을 갔는데 병동 환자가 내 에세이를 들고 읽고 있었다. 네이버 검색을 해 보고 내가 책을 냈다는 사실을 알고는 구매했다고 했다. 환자가 나에게 물었다.

"병원 일도 바쁘실 텐데 글은 대체 언제 쓰신 거예요?"

"틈날 때마다 썼어요."

과거형이다. 틈날 때마다 쓰고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터였다.

"교수님의 진심이 묻어나는 글들이 너무 좋네요. 2부도 계획하고 계시는 거죠? 저 같은 대장암 환자들에게 희망이 되도록 좋은 글 많이 써 주세요."

음... 글쎄요. 대충 웃으며 얼버무렸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이놈의 브런치는 잊어버릴 만하면 알림을 보내서 글쓰기가 운동과 같으니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중요하다고 나를 자꾸 가르치려 든다. 그래 나도 안다. 나는 지금 운동 부족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의 나는 쓰는 행위 자체가 부끄러우니 어찌할 방도가 없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작금의 사태가 해결이 되어야만 한 문장씩이라도 쓰는 연습을 다시 할 수 있게 될 것 같은데, 그때까지 쓰는 근육이 여전히 남아 있기나 할지가 걱정이다.


아니, 실은, 사태가 이대로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까 두렵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부부와의 약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