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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미녀 Aug 30. 2022

안면홍조와 부끄러움

그림책 <얼굴 빨개지는 아이>

<얼굴 빨개지는 아이>(장자크 상페,열린책들)

어릴 때 안면 홍조로 고민한 적 있다. 수시로 빨개지는 얼굴 때문에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어렸을 때는 그냥 흥분했겠거니 하고 넘어가던 친구들도 중학생이 되자 빨개지는 나의 얼굴을 궁금해했다. 이유도 없고, 빨개지기 시작하면 머리끝부터 손끝까지 보이는 모든 부분이 빨갛게 변해 흡사 토마토처럼 보이기도 했다. 콧대가 낮아 밤에 빨래집게를 꽂고 잘 만큼 외모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빨간 얼굴은 치명적인 오류였다. 하지만 신경 쓰면 쓸수록 얼굴은 더 빨개졌다. 버스 정류장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얼굴을 쳐다보면, 의지와 상관없이 손까지 빨개졌다. ‘아 정말, 저 사람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하면 어쩌지?’이 낭패감. 좀 더 자라면 없어질 거라는 어른들의 말과는 달리 오랫동안 이어졌다.


언제까지였더라. 대학생이 되어 이제는 오해 살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선배들은 금방 얼굴 빨개지는 나의 모습을 알아챘고 간혹 농담거리도 감기도 했다. 분했지만, 그냥 참는 수밖에 없는 날들이었다. 당시 나의 궁금증은 “왜 빨개지는가?”보다는 “어떻게 안 빨개질 수 있을까?”였는데, 안면 홍조를 극복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심리적인 문제인가 생각해서 정말 무념무상을 실천하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잡념이 많은 나에게는 전혀 맞지 않았다. 보건학 수업에서 안면 홍조와 다혈질은 갱년기 증상이라는 선배의 놀림도 참았지만, 평생 이러면 어쩌나 걱정됐다. 원인도 방법도 찾기 어려울 때, 심지어 엄마도 얼굴이 잘 빨개지지 않는데, 나만 그런 거 같아 고민했다.


얼굴 빨개지는 일 때문에 아직도 억울한 마음이 드는 사건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로 기억하는데, 반에서 한 친구가 돈을 잃어버린 일이 있었다. 당시에는 책상 위에 올라가 두 팔을 들고 벌서는 일이 많았는데, 그날도 어김없이 반 전체가 벌을 받았다. 침묵의 순간이 이어지고, 선생님은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의 특징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땀이 날 것이라고 덧붙이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순가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 눈을 감고 반성의 시간을 가졌기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어김없이 범인이 되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팔이 아파질수록 얼굴이 화끈거리고 땀이 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 스스로 ‘내가 훔쳤나? 혹시’라고 고민할 만큼 선생님이 말씀하신 죄지은 자의 모습에 딱 들어맞았다.


친구들은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지만 선생님은 나를 보셨을 것이다. 얼굴이 심하게 빨개지는 나. 그 사건은 선생님이 시간이 되어 벌을 끝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어린 마음에 나는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이 아니라 내 얼굴에 분함이 생겼다. 선생님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이 어린 나에게 내내 뇌리에 남았다. ‘혹시 나를 범인이라고 생각하셨나?’하는 생각이 1년 내내 나를 쫓아다녔다. 빨개지는 얼굴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킨 일이 많았지만, 이 사건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래서 더 빨개지는 얼굴에 신경을 썼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경 쓰임 때문에 더 욱어 얼굴은 수시로 빨개지고. 이 악순환.


 장 자크 상페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 등장하는 마르슬랭을 만나면서, 안면 홍조가 나만의 고민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친구들의 물음이 귀찮아서 혼자 노는 아이처럼, 나도 일일이 대답하기 싫어 많은 것들을 건성건성으로 넘겼다. 늘 기침을 하는 르네를 만나 친구가 되는 과정은 인상적이었다. 마르슬랭과 르네의 모습이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공감하고 채워가는 좋은 친구의 모습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마르슬랭은 감기에 걸릴 때마다 그의 친구처럼 기침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흡족해했다. 그리고 르네 역시 햇볕을 몹시 쬔 어느 날, 그의 친구가 가끔씩 그러는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 버린 것에 아주 행복해한 적이 있었다” (p.62)


나도 빨개지는 얼굴이 한 줌의 고민거리도 안 되는 시기가 찾아왔다. 더 이상 빨래집게로 더 이상 콧대를 높이고자 하지 않으면서, 어차피 주체적으로 생긴 외모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나를 그냥 그대로 봐주는 친구들이 생겼다. 빨개지는 얼굴보다는 나의 다른 면들을 더 집중해주고 관심 가져 주는 친구들 덕분에 서서히 토마토의 강박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간혹 지금은 얼굴이 빨개지는 것이 나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부끄러운 상황에서도 더 이상 얼굴이 빨개지지 않고, 뻔뻔스러울 때도 생긴다. 차라리 부끄러움을 아는 얼굴을 가지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낯짝이 두껍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둔감하지 않는 사람이고자 하는 약간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벗어던지고 싶은 모습이었는데 말이다.


얼굴이 빨개지는 고민은 나이가 들면서 이제는 도리어 부끄러운 상황에서도 얼굴이 빨개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얼굴이 빨개졌던 어린 시간의 나를 기억하면서 요즘은 많은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뻔뻔한 얼굴로 이야기를 하지만, 저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답니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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