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를 봐요!>-누군가를 본다는 것
오래 전 책에서 ‘벙어리장갑’이 혐오 표현이라는 말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겨울이 되면 손가락이 없는 장갑을 벙어리 장갑이라고 불렀는데, 그럼 뭐라고 부를까?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절름발이’ ‘꿀 먹은 벙어리’ ‘결정장애’ ‘선택 장애’등의 말들이 사용되어 정치인들이나 유명인들이 사과하는 촌극도 빚어지기도 한다. 학교 다닐 때는 이런 표현들에 대해 큰 문제의식은 없었다. 장애인에 대응되는 말을 ‘일반인’으로 배웠으니 말이다. 실제 법률이나 행정 공문에도 그런 표현들이 여과없이 사용된다고 한다.
학창 시절 몇몇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다. 중학교 때는 늘 민머리로 다닌 친구가 있었다. 어릴 때 병을 앓아 더 이상 머리가 잘 나지 않는다는 소문만, 직접 묻거나 들어본 적이 없으니....그리고 손가락이 늘 굽어 있던 친구도 생각난다. 그 친구는 늘 손을 손수건 같은 것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본 친구의 손은 너무 괴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친구와 악수를 하고, 숙제를 하고, 밥을 같이 먹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외모에 예민했던 나와는 달리 늘 활달한 웃음을 지었던 친구는 자신의 머리를 아무렇지 않게 드러내고 다녔다. 한동안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쟤는 신경쓰이지 않나?’ 그 질문 외 나는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물론 외모에 대한 우리 나름의 규칙이 있었으니 물어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건 다른 친구들에게도 같다. 친구였으니, 장애가 무엇인지도 실감하지도 못했다. 우선 노는데 전혀 어색한 게 없었으니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때의 나는 친구들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부족했을 수 있다.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할 필요도 없을 때였으니까. 하지만 당시 친구들에게도 구분이 없었을까 되짚어 본다. 나는 장애가 없으니, 그냥 넘어가는 일도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정진호 작가의 <위를 봐요!>는 2014년 볼로냐 라가차상을 수상한 작품이며, 그림은 수지가 아래를 보고, 우리는 그런 수지의 정수리를 보는 구도를 취한다. 수지에게 거리를 둔 듯한 구조가 다리를 잃은 수지를 대하는 평소의 우리 모습처럼 느껴진다. 자동차는 바퀴를 잃었고, 수지는 다리를 잃은 상황. 그것도 행복했을 가족 여행 중에 말이다. 장애라는 것이 언제든지 행복한 순간에 생길 수 있는 것임을 드러내는 듯 하다. 탄생의 기쁨 속에서, 한 발을 떼는 걸음마 순간에, 그리고 행복한 일상의 시간에. 나는 장애보다는 수지의 외침과 그 외침에 돌아본 아이와 그리고 다 함께 누울 수 있는 행동을 생각해 본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우리는 외쳐야 할 때도 있지만 그 목소리는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기 전에 사라질 때도 많기에.
이 책을 읽으며 그때의 친구들을 떠올려 보았다. 친하게 놀았지만, 깊은 고민을 나누지는 않았다. 취향이 달라서, 학업에 바빠서. 그때의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의 기억속에 나아 있던 그들과 달리 친구들의 기억 속에 나는 없을 수도. 모쪼록 상처주는 사람이 아니었기를. 하지만 가까이서 친구들과 지냈기 때문에 나는 장애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특별히 친절을 베풀지도, 어색해 하지도 않는다. 이 책을 읽은 후 누군가는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기도 했고, 앞으로 좀 더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의 소수자일 수도 있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따뜻한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마음이 우리를 더욱더 장애인과 어울려 사는데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때가 있다. 배려하는 마음은 결국 멀리하고 싶은 불편함으로 돌아올 때도 있다. 이런 입장 안에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에 비해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가 돌아본다. 하던 일 때문에 장애인 복지센터에서 장애인분들과 상담을 한 적이 있다. 휠체어를 타고 오는 분과 상담을 하면서 나 자신도 ‘장애인은 이럴 거야’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그분의 여러 공동체 활동 얘기에 나도 모르게 머릿 속으로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이야기는 내 속에 남아 있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의 한 조각을 태웠다.
수지의 삶은 베란다에 있지만 “검정 머리만 보이는 사람들은 빠르게 길을 지나갔”고, 수지는 묵묵히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의 시간과 수지의 시간을 참으로 다르다. 2001년부터 이뤄지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생각해본다. 경기도 시흥시에서 일어났던 장애인의 장애인용 리프트 추락사건을 계기로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국장애인연합은 최근에도 서울시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출근길 많은 이들의 생계를 위협하며..... 그들의 투쟁에 공권력을 투입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아가며. 헌법은 국민 모두의 행복추구권를 보장하고 있는데, 이럴 때 그 헌법 조문은 교묘히 비켜간다. 불편함을 말하는 이들도 있다. 출근시간 바쁜데 이렇게 힘든 시기에 그들의 행동을 생떼라고 폄하하는 이들도 많다. 그들은 잘 모른다. 이제껏 저상 버스가 없어서 지하철 리프트가 없어서, 장애인용 통로가 없었던 시간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그 시간에 출근하지 않아서는 아니다.)
어릴 때 장애인의 모습을 시장에서 본 적이 있다. 두 다리가 없는 몸으로 시장 바닥을 거의 기어서 구걸을 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엄마에게 달려가 “왜 그러냐?”고 물었고, 그 이후로도 그 아저씨를 볼 때마다 무서움과 동시에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팔이 한쪽 없었던 아저씨의 손에 달린 갈고리 같은 것에도 공포감을 느낀 적이 있다. 우리는 장애인의 모습을 낯설게 바라볼 때가 있다. 나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감정은 어떤 경우에도 생긴다. 외국에 나가면 내가 그런 존재 되는 것처럼. 그래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 교육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어울려살아야 안다.
그림책 속에 한 아이가 “너 뭐하니?”라고 묻는다. 아이의 질문이 그 생소함을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냥 물어주는 것 말이다. 수지가 다리를 다쳐서 못 내려 간다고 하자 아이는 “그럼 이건 어때?”라며 길거리에 누워 버린다. 아이의 행동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아이로서 내려올 수 없는 아이에게 개미 같은 머리만이 아니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전해진다. 그 다음에 아이가 길거리에 누워있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차례로 눕니다. “모두들 위를 봐요”라면서. 위를 보는 행동은 사실 특별하지도 큰 노력이 들지도 않는다. 물론 길거리에 누우면 온갖 먼지를 뒤집어 쓸 각오 정도는 해야하겠지만. 그럼에도 그 행동들은 수지에게, 누워서 수지를 보는 모두에게 어떤 의미를 만든다.
수지가 내려간 창가에는 조그만 싹이 튼 화분이 남겨져 있다. 여전히 사람들은 지나가지만, 자전거에 풍선이 가로수에 꽃이 펴 있고, 어떤 물건들은 색칠이 되어 있다. 수지가 웃어서 좋다. 단순한 질문과 행동의 이유는 그렇게 만들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