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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Jun 20. 2023

오늘도 주저리

보호 필름과 레슬러와 내 안의 작은 교양이 만나면

  액정 보호 필름이 찢어졌다. 출근을 준비하던 아침이었다. 휴대전화를 화장실 선반 위에 잠시 올려 두었는데 툭, 하고 세면대 위로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집어든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액정 위를 쓱 훔쳤는데, 한가운데 이상한 부분이 보였다. 무엇이 묻었나 싶어 몇 번을 문지르다가 뒤늦게 움푹 파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 중앙의 액정 필름 일부가 손톱 반절 크기만큼 떨어져 나가 있었다. 몹시 신경이 쓰였다. 휴대전화를 산 뒤로 한 번도 노출된 적이 없는 부분이었다. 오늘 하루 늘 손에 전화를 쥐고 다닐 것이고, 분명 상처 날 일을 만들고 말 것이었다. 뒤늦게 액정 보호 필름을 갈아 붙여도 한가운데 난 흠집에 두고두고 신경을 쓰겠지. 퇴근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서비스센터부터 가야겠다고, 거기서 원래 붙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보호 필름을 붙이고서 약속 장소로 이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퇴근 시간,


  이중 주차된 내 앞차의 주인은 중대한 업무 속에 파묻혀 있었고, 나는 차가 빠지기까지 한 시간 가까이를 기다려야 했다. 서비스센터는 무슨. 약속 시간마저 늦어버렸다. 손톱 반절 크기의 홈이 패인 채로, 휴대전화는 그렇게 아직 내 옆에 놓여 있다.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아직 다 보지 못했으니 '보았다'는 서술어는 부정확하다. 아니지. 생각해 보니 일부러 보기를 멈추었으니 '보지 못했다'는 서술어 또한 부정확하다. 헬스장에서 트레드밀 위를 달리면서, 영화를 보다 말았다.

  잠시 쉬었던 운동을 얼마 전 다시 시작했다. 피트니스 센터의 1년 회원권이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이었는데, 언제나 그랬듯 막판에는 흐지부지, 계약 기간의 절반 가량은 기부천사 노릇을 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놓치고 싶지 않았는지 헬스장 쪽에서 등록 연장을 권유하기 위한 전화를 몇 번 해 왔다. 이상하게 그때마다 받지 못했다. 정말 못 받은 거다. 받기 싫어서 회피한 게 아니라.


  그렇게 살은 찌고 회원권은 만료되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공짜 운동이나 하자 싶어 중랑천변을 몇 번 그냥 내달렸다. 상쾌하고 좋았다. 다 좋았는데, 옷이 땀으로 흠뻑 젖으니 뒤처리가 곤란했다. 매일 같이 세탁기를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손빨래할 정성까지는 못되고. 그러니 운동복을 대여해 주는 피트니스 센터가 그리웠다. 마침 날도 더워지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맞으며 달리면 더 상쾌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결국 재등록을 했다. 기한 연장 기간을 놓쳐서 가격이 훨씬 비싸져 있었다. 또 한 번 기부천사로의 소임을 충실히 해냈다.

  이상하게 트레드밀에서 달리기를 하면 중랑천변을 달릴 때보다 훨씬 빨리 지쳤다. 정말로 달릴 때는 30분을 쉬지 않고 내달렸는데, 기계 위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니 천천히 뛰는데도 20분을 뛰면 숨이 가쁘고 다리가 풀렸다. 몸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잊고자 영화를 틀었다. 넷플릭스로 집에서 40분가량 보다가 잠들었던 영화였다. 좋은 감독의 연출에 좋은 배우의 연기가 더해진 좋은 영화라 알고 있었기에 처음 개봉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꼭 봐야지, 생각했던 영화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왜, 보지 않아도 대충 감이 오는, 그런 종류의 영화가 있지 않은가. '퇴물 레슬러의 이야기'라는 소재만으로도, 감정이입을 하기 시작하면 틀림없이 괴로워지는 영화일 거라는 불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래서 넷플릭스에 올라온 것을 보고도 오래도록 '찜'만 해 두었다가, 얼마 전에 기어이 조금 보다 말았던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불편한 예감은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한때 최고의 프로레슬러였던 사람이 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은 퇴색된 지 오래. 퇴물이 되었으나 여전히 먼지가 뽀얗게 앉아 누더기가 된 과거의 영광에 취해 살고 있다. 링 위에 설 때 느끼는 사람들의 환호와 후배들의 존경의 헌사가 마지막 자존심이다. 한데 이제는 건강을 완전히 잃고, 선수 생명마저 끝장이 났다. 그제야 가족의 품이 필요함을 느끼고 사실상 버린 채 살았던 딸을 찾아간다. 여기부터가 러닝머신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보았던 내용이었다. 늙고 병들어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를 딸은 당연히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 생일에도 한 번 찾아온 적이 없으면서. 원망의 말과 함께 글자 그대로 '퍽유'를 날리며 아버지를 쫓아낸다. (나쁜 아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게 아빠한테 해도 되는 말인가 싶다.) 미안한 마음에 선물을 사들고 다시 딸을 찾은 아버지. 아빠가 직접 고른 촌스럽게 반짝이는 녹색 점퍼에는 넘어오지 않던 성인 딸이 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고른 피코트를 받고는 아버지의 데이트 신청을 허락한다. (이렇게 쉽게?) 추억의 장소를 함께 거닐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아버지의 눈물을 보며 함께 눈물을 글썽이는 딸. 저런 아버지를 저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조금 의아하기는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한 걸 수도 있고, 뭐 몇 번 더 거절했는데 러닝타임 상 생략한 것일 수도 있겠지.


  젊어서 제멋대로 살던 인물이 늙고 병들고 외로워지자 가족을 찾게 되고, 화해와 용서 끝에 화목한 가정의 회복으로 이어진다는 전개는 너무 클리셰적이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런 이유에서 30분가량 남은 영화 재생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벌겋게 달아올라 후끈거리는 얼굴 아래로 운동복 상의를 땀으로 다 적신 채 스스로와 다짐했던 트레드밀 위의 유산소 운동 시간 30분이 다 끝나긴 했지만... 영화를 마저 보지 않은 것은 외로운 주인공이 이렇게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찾은 채로 영화를 끝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남은 30분 안에, 여기저기 전화해서 은퇴선언을 하기는 했지만, 꼭 저 잔혹한 링 위로 운명처럼 다시 이끌리게 될 것만 같았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 레슬링 경기장 위로. 의사는 레슬링 경기를 다시는 할 수 없는 몸상태라는 의사 고유의 멘트를 날렸지만, 비록 링 위에서 죽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역설로 영화가 마무리될까 봐, 그게 겁났던 것 같다. 정육점에서 자존심을 구기고 고기를 튀기고 샐러드를 퍼주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왕년의 스타에게는 비참한 일일지라도, 또 누구에게는 너무도 지당한 삶의 모습인 것을.


  퇴근 시간을 앞두고 교장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여름방학 방과후수업의 강좌명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이 이름으로 아이들이 모이겠어? 진심으로 걱정되어하는 말임을 알고 있었다. 혹시라도 폐강될까 봐서. 나는 괜찮다고 답했다. 별 것 아닌 이름이지만 나는 그 이름을 짓고 꽤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내 안의 작은 교양." 수학, 과학 아니면 밥벌이 못한다고, 인문학이고 뭐고 코딩이나 배우라고 대통령이 앞장서서 등 떠미는 요즘에도 변함없이 필요한 '내 안의 작은 교양.' 물론 경험상 어른들 말씀은 하나 틀린 게 없고, 어른 말 들으면 잘못될 일도 없고, 걱정하시는 어른의 사정과 이유도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어른 말 듣지 않고 깨지고 부서지는 게 또 젊은이의 패기가 아닌가. 충분히 괜찮습니다,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뭐 어때. 내심 불안하지만, 뭐 어때. 손 끝에 까슬하게 닿는 찢어진 보호 필름의 감촉처럼 그렇게 마무리되는 하루의 끝이었다.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링 위로 달려드는, 그런 레슬러의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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