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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겨울 Sep 17. 2023

희망 없는 시대

우울한 이야기

 데이빗 핀처 감독의 영화를 좋아했다. 누군가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누구냐 물으면 꼭 그의 이름을 대던 때가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나 감독의 작품에 대한 편식이 심한 편이어서, 그의 연출작은 영화던 드라마던 가리지 않고 모두 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가장 먼저 <세븐(1995)>이 떠오른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회색 도시에는 이름이 없다. 늘 비가 오는 음울한 도시는 뉴욕시를 모델로 했다지만 사실 어디라도 될 수 있다. 영화에서 도시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고 도처의 죄악을 묵인한 채 살아가는 죄악만으로 가득한 도시. 많은 명장면 중에서도 유독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남편의 파트너이자 상관인 형사에게 면담을 요청한 젊은 아내가 고민을 털어놓다 왈칵 울음을 쏟아낸다. 대도시로 막 이주한 그녀는 뱃속의 아이를 낳아 키울 자신이 없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못할 짓이다. 퇴임을 앞둔 늙은 형사는 헤밍웨이의 말을 인용한다. '세상은 아름답고 싸워볼 가치가 있다.(The world is a fine place and worth fighting for.)' 그러나 아름답지 않은 세상.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세상. 노인은 오직 후자에 공감할 뿐이다.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가 유독 떠오르는 이유가 무얼까? 몇 달 새 많은 일이 있었다. 세상은 끔찍한 곳이 되었다. 대도시에 살면서 사람 많은 곳은 피하라는 안부 인사를 나누는 처지가 되었다. 백주 대낮에 강력범죄가 발생했다. 살인 예고가 쏟아졌다. 어마한 분량의 마약이 도처에서 발견되었다. 인도에서 차에 치인 보행자는 어떠한 구호 조치도 받지 못했다. 노동자가 기계에 끼어 사망하고, 대민지원을 나온 군인이 급류에 휩쓸리고, 교사가 교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누구도 사과하지 않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거짓으로 거짓을 덮었다. 오의 시대라고 불렀다. 부에서 공인에 이르기까지 어디 하나 사정이 다르지 않다. 범죄로 점철되었을뿐더러 최소한의 교양도 갖추지 못한 이가 사회 지도층 행세를 한다. 자기 범죄를 덮고자 곡기를 끊는 것이나 권력을 앞세워 불법을 덮는 것이나. 어느 쪽도 나을 바 없는 데칼코마니다. 잔인한 사건이 극악한 사건으로 덮이며 감각은 뎌진다. 언론과 매체는 그저 일차원적인 욕구에 집중하도록 유도하는 기능에 충실하다. 어디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가 있는가? 우리나라를 벗어나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죄악으로 가득한 영화 속 도시는 디라도 될 수 있다. 경제는 무너지고 기후가 뒤틀리고 마약이 휩쓸고 파시즘이 도사린다. 어느 대륙을 막론하고 아름다운 세상은 없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은 큰 도전이다. 정상이라면 왈칵 울음을 쏟아 내어야만 하는 시대가 되었다.


 예고된 비극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학부모의 갑질에 시달리던 교사가 교실에서 죽음을 선택했다. 많은 이들의 추모와 분노가 이어졌다. 그러나 예고된 비극이었다. 비슷한 상황에서 목숨을 끊었으나 죽은 장소가 자택이라는 이유로 뉴스 한 줄 실리지 못한 다른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예고된 비극이었다. 승무원에게, 백화점의 판매 사원에게, 배달앱 너머의 음식점 사장에게, 이해관계에 있어 조금이라도 을의 위치에 있다고 여긴 수많은 사람들에게... 권력관계가 조금도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인간 세상은 동물의 왕국이다. 상대적 약자에 관한 갑질로 점철된 세상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갑을의 관계가 또 다른 서비스 직종으로, 학교로 전이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뉴스가 된다.


 예고된 비극이었다. '포스트 모던'한 것이 그런 것이었으니까. 무엇이든 옳고 무엇이든 선이 될 수 있는 시대다. 그게 시대정신이다. 절대적인 기준, 절대적인 선, 절대적인 도덕을 스스로 내다 버린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선택이었다. 옳고 그름이 비교적 분명하던 때도 있었다. 인간 이성에 관한 믿음으로 무장한 시대였다. 이때는 희망이 있었다. 이성의 빛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 주리라는 장밋빛 기대 아래 사람들은 무엇이든 배워나갔다. 자유주의의 숭고한 이념을, 날 때부터 평등하게 부여된 권리가 있다는 복음을 끊임없이 전파했다. 그것으로 전체주의와 싸웠고 또 이겼다.


 인종청소를 업으로 삼은 나치는 이제 없다. 만들어진 괴물에 가까웠을지언정 싸움만큼은 치열했던 공산주의도 힘을 잃었다. 쉐도우 복싱이 허공을 가르고 남은 자리에는 공허만 남았다. 거대한 두 차례 세계대전이 인간 이성의 결과물이었다. 절대 진리를 말하면 항상 반례가 튀어나왔다. 각종 범죄, 폭력과 살인, 마약과 섹스 같은 것들이 영상 매체를 가득 채웠다. 도덕의 훈계는 고리타분했다. 인스타그램의 원초적인 피드가 유일무이한 진리가 되었다. 갈피를 잃은 눈동자를 맘몬(Mammon)이 가득 채웠다. 그러고는 되묻는다. 이게 어때서? 욕망에 솔직함이 부끄러울 일인가?


 고리타분하고 비이성적인, 종교의 노예로 종속된 사람들의 처량한 삶으로 가득한 어느 경전은 죄악의 시대를 이렇게 묘사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였다." 모두가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최우선으로, 자기 욕망에 충실하게, 자기 이익과 만족과 쾌락을 위해서, 그렇게 저에게 옳은 대로 저에게 좋은 대로 행동한다. 그 결실로 맺어진 썩은 열매로 가득한 밭을, 이제 막 수확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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