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하지 않은 장기 투자자의 길
95년 초,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국내의 한 철강회사에 취업했습니다.
대졸 월급을 받았고, 초과 근무라도 하면 이 나라 최고의 단가로 대우받았습니다.
동기들은 너도나도 H 자동차에서 나온 헤드라이트가 호랑이 눈 모양인 1,500cc 자동차를 샀습니다.
어찌어찌 공대를 나왔으나 엔지니어 생활은 여전히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으로 출장 연수의 기회가 찾아왔고, 브로커를 써 가며 미국 대사관에서 인터뷰까지 마쳤건만 저를 곯려 먹기에 혈안이던 노하우 전수 기피증의 화신인 사수의 훼방으로 무산되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또 한 번은 난생처음 입찰이란 회사의 중대 사안에 맞닥뜨렸는데, 사수는 나 몰라라 하고 과장은 신입인 저에게만 그 업무를 죄다 맡기는 바람에 결국 유찰되어 회사가 뒤집힐 뻔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 이곳은 내가 일할 데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뻗쳤고, 급기야 1년 만에 퇴사하고 말았습니다.
삼십 대 초반 두 번째 회사에 입사했을 때입니다.
출근하니 아침 일찍부터 사무실 모니터 앞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선배들은 근무 투입 시간에 앞서 국내 주식 시장이 열리기 전, HTS(Home Trading System) 호가창을 내다보며 잡담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어떤 회사에서 무슨 무슨 제품을 만드는데, 그 제품이 앞으로 어쩌고저쩌고…, 제법 전문가 흉내를 곧잘 내는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2000년도 초반, 당시 열에 아홉은 주식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고, 너도나도 월급 외 부수입에 열을 올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월평균 급여 40만 원대의 수습사원이던 저에게 주식으로 돈 벌었다며 술을 사주겠다는 선배들의 모습이 마냥 신기하게 다가왔습니다.
어느 날 한 선배가 캔들 차트 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양봉일 때와 음봉일 때의 시가와 종가, 위꼬리와 아래꼬리의 의미, 망치형과 역망치형일 때의 주가 전망 등등.
그의 열강은 저에게 귀에 쏙쏙 들어오는 일대일 과외수업과 같았습니다.
누군가를 직접 가르쳐 봄으로써 자기 공부가 확실하게 된다고 했던가요.
그 선배는 신이 나서 틈날 때마다 저에게 주식에 관한 열변을 늘어놓았는데, 어느 날 제 눈이 반짝이는 것을 보더니 갑자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절대로 주식 하지 마라.”
선배는 반짝이는 제 눈에서 주식 투자로 망할 가능성을 보기라도 한 듯싶었습니다만,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어리바리한 사회 초년생은 한 달 일해서 받은 피 같은 돈 40만 원으로 그렇게 주식 투자에 발을 들였습니다.
주식 시장에는 희한한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누구나 주식에 첫 입문했을 때는 이른바 '단타' 매매로 돈을 딴다는 것인데요.
더 웃기거나 웃기지도 않는 사실은, 앞의 그 누구나 딴 돈의 배 이상을 잃음에도 본전 생각이 나서 아무도 주식 시장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미국 시장은 몰라서라도 꿈도 꾸지 못할 때였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