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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담우극장

폭력 만세!

-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

by 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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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류가 대전환기를 맞고 있음을 진단하는 의견이 자주 화두에 오르고 있다. 그 요인으로 지적하는 바(AI, 전쟁, 양극화….)는 논자에 따라 가지각색이지만 시대의 전환이 몰고 올 혼돈을 우리는 몸소 체감하고 있다. 다만 앞으로 저물 ‘저 시대’에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어쩌면 종말을 목전에 둔 그 한 시대는 ‘팍스 아메리카나 Pax Americana ’일지 모른다. 미국이 가졌던 강력한 패권이 빛을 잃고 있음으로 인해 주요 강대국은 다음 패권국의 지위를 누리기 위해 다툼을 벌인다. 누군가는 “제3차 세계대전”이라는 무시무시한 예견을 제기한다. 물론 이것은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시대가 정말 존재하였고 그것이 저물고 있음이 맞다면, 우리가 맞이할 혼란은 그 주인을 잃고 날뛰는 헤게모니 탓에 벌어질 것이다.


어떤 한 시대의 종말과 마주한 인류는 ‘폭력’이라는 가장 손에 익은 도구로 곧잘 돌아간다. ‘폭력’의 반대되는 항은 ‘비폭력’이 아닌 ‘권력’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임상적 판단은 옳았던 듯하다. 우리는 권력이 제 곳을 잃자 폭력이 그 진공을 메우는 모습을 매일 새로운 형태로 목격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계의 어떤 개인은 그 자신의 삶과 전혀 무관한 이유로 인하여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묻지마 범죄’와 같은 아노미 상황을 언론과 미디어가 이전보다 자주 보도한다는 사실 따윌 들먹이는 일은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에 전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통계학 또한 얼마 만큼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지만 구태여 폭력과 연한 광범위한 데이터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무력 갈등에 대한 정확하고 접근용이한 데이터를 제공하기 위하여 설립된 미국의 비영리단체 ACLEDArmed Conflict Location & Event Data는 2024년 12월 발표한 ‘갈등 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인의 8명 중 1명은 정치 폭력political violence 상황에 노출되었다. 또 빈도로 보면 세계 전반에서 당해의 1년 전과 비교하여 25% 더 자주 정치 폭력이 벌어졌다. ACLED는 해당 보고의 부제를 다음과 같이 작성하였다. “국제 갈등이 지난 5년 동안 두 배로 증가했다.” “Global conflicts double over the past five years.”


기독교 질서 위에 세워졌다 자부하는 서구 세계 주요 강대국은 누구보다 발빠르게 ‘폭력’이라는 도구를 찾고 있다. “타인의 생명을 빼앗지 말라”라는 강력한 계율은 이제 인류 문명의 수면 아래 제 모습을 감춘 듯만 하다. 매일, 어김없이 어느 주요 강대국 지도자가 새로운 형식의 ‘예외 상태’를 선포한다. 하여 그들은 상시적으로 또 합법적으로 유용 가능한 폭력 수단의 범주를 늘리는 일에 힘쓴다. (우리는 이 행위를 작년 12월 국내에서도 목격하였다.)


더하여, 폭력은 늘 강한 전염성을 띤다. 말하자면, 폭력은 인류가 마주한 질병 중 유일하게 높은 치사율과 빠른 전파 속도를 동시에 지닌 전염병이다. 폭력 행위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 바깥에 존재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그 전파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폭력이 지닌 이와 같은 영향력은 늘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가장 치명적이다. 그들이란 세상 만사를 최소한 납득 가능한 형식으로 재배열하지 않고는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의 집단인데 폭력의 힘은 이들 노력을 너무나 손쉽게 무산시키고 좌절시킨다.


여러 말을 늘어 놓았지만 결국 내 관심사는 감각할 수 있는 사실 수준은 아니다. 내가 주목하는 곳은 언제나 앞서 언급한 “특별한 감수성을 가진 채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늘 그들처럼 되어 보고자 노력하였고 번번이 실패한 사람으로서, 내가 궁금한 것은 이 예민함을 가진 사람들이 시대의 전환에 수반되어 온 ‘폭력’과 ‘갈등’을 어떻게 감각할지 하는 것이다. 하여 ‘폭력’이라는 주제를 관하는 작품 들을 다시 돌아본다. ‘선행 연구’를 달달이 외는 연구자의 심정으로 각 작품이 ‘폭력’에 어떤 좌표를 부여하였는지 톺아본기 위함이다.


- 지옥이 뭐가 나빠, 소노 시온, 2013

소노 시온의 <지옥이 뭐가 나빠>는 ‘퍽 바머스 Fuck Bombers ’라 자칭하는 괴짜 영화광 집단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이 필모그래피의 처음을 장식할 영화를 제작하기까지의 투쟁사를 그린다. 두 명의 카메라맨 지망생, 한 명의 배우 지망생, 그리고 그들의 중심인 감독 지망생 히라타가 ‘퍽 바머스’의 멤버진이다. 히라타는 다음의 대표적인 대사로 요약할 수 있는 인물이다. “최고의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살해당해도 좋아. 죽어도 상관 없어.” 심지어 그는 꼭 그날이 오도록 “영화의 신”께 빌고 있다. 그는 자신이 자부하는대로 그저 “영화 바보”다.


‘퍽 바머스’는 좋은 장면을 찍을 수만 있다면 학생들의 패싸움 현장 속에 뛰어들거나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는 야쿠자에게 따라 붙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영화 제작이라는 꿈 아래 결성된 그들은 그리하여 10년을 함께 보낸다. 그 10년 동안 그들이 남긴 것이라곤 시대에 뒤쳐진 사무라이 시대극의 파일럿 필름뿐이다. 시대에 뒤쳐진 것은 그들이 찍은 파일럿 필름만이 아니다. 그들의 아지트였던 소극장은 이제 불량 청소년들이 모이는 폐건물이 되었다. 그들이 ‘진짜’ 영화로 기억하던 35mm 필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디지털 방식에 밀려났다. 그들이 그토록 좇던 ‘진짜’는 10년의 세월과 함께 이미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곳을 떠나지 않고 있다.


‘퍽 바머스’만이 아니라 <지옥이 뭐가 나빠>의 모든 등장인물은 과거에 무언가를 두고 온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무엇에 ‘진짜’라는 표찰을 붙여 섬기고 있다. 야쿠자 집단 ‘무토 파’를 이끄는 두목 무토는 수감된 아내를 그리워 하고 있다. 정작 아내가 자신의 곁에 있을 땐 제대로 그녀를 돌보지 않던 그는 지금 아내의 꿈이었던 딸 미츠코의 배우 데뷔를 위해 조직의 명운을 걸 정도이다. 그런가 하면 무토의 딸 미츠코 또한 CM 배우로 활약하던 아역 시절을 기억한다. 미츠코는 아버지 무토의 연줄로 출연 기회를 얻은 어설픈 스파이 영화로 데뷔하는 일 따윈 하고 싶지 않다.


‘무토 파’의 라이벌 조직인 ‘이케가미 파’의 리더 이케가미는 이런 도착적인 집착이 눈에 띌 정도로 두드러진 인물이다. 이케가미는 선대를 이어 두목으로 데뷔할 때 역시 야쿠자라면 전통 의상인 “와후쿠”를 입어야 한다느니 “성으로 이사한다”며 일본식 목조가옥에 자리를 잡는 둥 이상한 신조를 내세운다. 이와 같은 이케가미의 협객정신은 분명 과거에도 존재한 적 없는, 우스꽝스러운 미몽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케가미가 상상하는 ‘진짜’ 야쿠자의 모습이다.


<지옥이 뭐가 나빠>의 중심 인물 모두는 자신의 과거와 제대로 화해하지 못한 채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낭만 혹은 열정이라고나 부를 법한 미묘한 동기에 취한 채 과거에 두고 왔어야 마땅할 것에 집착하고 있다. 다행인 사실은 언젠가 병증을 향해 치닫고 말 이런 집단적 증후가 일소에 해소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기회란 다름 아닌 “영화 바보”인 히라타의 기획에 의해 일어난다. ‘퍽 바머스’의 첫 영화 제작, 미츠코의 배우 데뷔, 이케가미의 협객정신 실현. 이들을 한꺼번에 해소할 히라타의 기획은 다름 아닌 ‘무토 파’와 ‘이케가미 파’의 항쟁을 영화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라는 격언이 있듯, 전쟁의 결말이란 본래 패자의 진실이 묵살되고 승자의 진실이 공인되는 시점이다. 다만 ‘무토 파’와 ‘이케가미 파’의 전면 항쟁은 영화 제작이라는 고리에 의해 엮이게 되며 한 편의 서사로서 성립된다. 하여 이 항쟁은 ‘전쟁’이 아닌 ‘전쟁-서사’가 되는 까닭에 어느 쪽이 진실을 성취할지는 승패에 따르지 않는 것이 된다. 이 항쟁이 일어나는 ‘이케가미 파’의 아지트는 모두를 위한 해원의 장소로 탈바꿈한다.


미츠코가 카타나로 야쿠자 조직원을 베어 나가는 모습이 카메라 렌즈 속에 새겨질 때 무토는 기습으로 인해 참수당해 죽는다. 그리고 목이 달아난 무토의 육신은 승리의 브이 사인을 그린다. 자신이 줄곧 좇아온 ‘진짜’ 사랑인 아내의 꿈(미츠코의 배우 데뷔)을 대리하여 성취한 순간, 이때 무토의 생명을 빼앗는 ‘폭력’은 단순히 상대를 침묵시키는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기어이 과거와의 화해에 성공한 ‘등장인물’에게 오직 그때 마땅한 결말을 선사하는 수단이 된다.


다만 한 발의 총성이 이 장소에 둘러진 마술적 힘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저 무토를 해한 이케가미를 향한 개인의 증오를 해소하고자 총격을 쏘아 복수한 한 조직원의 행동에 의해 이 장소를 지배하던 마술적 힘은 금세 흩어진다. “일본 남아”답게 “카타나”로 싸울 것이라는 규칙을 보기 좋게 무너뜨린 이 행위로 인해 이케가미 파 아지트는 그저 총성이 난무하는 난장판으로 뒤바뀐다. 그런 난장의 와중에도 ‘퍽 바머스’는 “좋은 영화를 위해 죽어!”라 외치며 전장을 누비며 그 진창마저 빠짐없이 포착한다. 서사가 그 규칙을 잃고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퍽 바머스’는 그것을 기록한다. 그것도 즐거움을 잃지 않으며.


허나 그 균열은 결국 ‘권력’이 이 장소를 침투하길 허용하기에 이른다. 오래도록 무토를 주시해온 형사 타나카가 기동대를 대동하여 출동해 이야기의 맥을 완전히 끊고 이곳의 인물들에게 마땅치 않은 결말을 선사한다. 이들에 의해 폭력을 둘러싼 마술적 힘은 손쉽게 벗겨진다. 분명 이곳에 속할 자격 없는 제3자에 의해 무토 파와 이케가미 파의 ‘전쟁-서사’는 부당한 결말을 맞는다.


그럼에도 “살해당해도 좋아!”를 외쳐온 히라타는 초인이 되어 이 자리에 부활한다. 지치고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선보이겠다는 치기 어린 욕망에 의해 추동되어 온 그의 삶은 부당한 결말과 결코 합류하지 않는다. 그는 두 조직의 항쟁이 담긴 필름과 오디오 기록을 회수하며 하나하나 자신의 촬영에 협조한 이들에게 감사의 말을 건넨다. 그리고 그것을 가득 끌어안은 채 그 수라장에서 빠져 나온다.


다시 언급하자면, <지옥이 뭐가 나빠>의 인물들은 과거에 무언가를 놔두고 왔으며 영영 그것에 의해 책잡힌 인물이다. 그들은 ‘폭력’을 낭만화 Romanticize 하는 ‘전쟁-서사’의 힘을 경유하여 미결에 놓인 자신의 이야기를 결말짓길 시도한다. 오직 온당한 수단만을 선택하여야 할 때 그 화해를 이루기란 얼마나 지난한 일이겠는가. 더불어 그런 시도는 영화로 제작할 이야기거리조차 제공하지 않을 테니 애초부터 히라타를 매료하지 않았으리라. <지옥이 뭐가 나빠>는 폭력의 파괴성과 상투성을 뒤집어 그것에 예외적인 창조성과 독창성을 부여하는 일을 통해 인물들이 그 일을 화끈하고, 또 즐겁게 이룰 수 있도록 용인한다. 하여 이 영화의 제목은 아이러니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퍽 바머스와 무토, 미츠코, 이케가미, 그리고 코지. 이들은 그것이 실로 실존하는지 확신치 못하면서도 어떤 진실의 편린을 좇아 기꺼이 수라장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찾았음을 직감할 때 마땅한 결말로서의 죽음을 당당히 맞는다. 본래 미결로 남은 과거와 직시하거나, 화해하거나, 극복하는 따위의 작업은 본래 복잡다단한 절차를 필요로 한다. (굳이 언급할 필요 없겠지만 프로이트와 같은 학자는 그 일이 이루어지는 적절한 양식을 수립하기 위해 자신의 놀라운 재능 대부분을 쏟기도 했다.) 더 끔찍한 사실은 이 작업은 개인의 선택과 무관하게 필연히 생애작업이 된다는 것이다.


이럴 때 그 특유의 선명함으로 인하여 ‘폭력’은 무엇보다 매력적인 수단이 된다. 정말, 문제는 폭력의 선명함이다. 폭력은 해결의 수단으로서 활용될 때 동기, 수단, 목적의 관계에 본래 놓여야 할 절차를 가뿐히 파쇄하고 훨씬 간편한 형태로 봉합할 능력을 띤다. 더불어 폭력은 결국 언제나 미묘한 것이나마 진실을 옹립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수단이다. 그것은 늘 타자를 침묵시키는 일에 능하며 우리가 지닌 가장 내밀한 장기는 타자만 “닥쳐” 준다면 어떤 형태의 진실이든 기쁘게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었다. 비록 그 끝에 도달할 진실이 종이인형처럼 불충한 것일지라도 이와 같은 폭력의 용이함을 누릴 수 있다면 ‘절차의 정당성’ 같은 공화국 시스템의 부산물 따위 우리는 언제든 내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폭력은 실용주의와 가속주의 요구에 성심껏 부응한다.


하여 ‘퍽 바머스’가 좇아온 꿈이 일본도와 권총이 맞대고 선혈과 잘린 신체가 낭자하는 악몽이어야만 하는 까닭이 완전히 이해된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자부하듯 “영화 바보”의 방식이다. 외려 이것이 아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윤리라든지 규범이라든지 하는 우리 피부에 맞지 않는 옷을 잠시 벗어두고 짜릿하고 통쾌하며, 노골적이면서 선연한 35mm의 진실. 그 “바보” 같은 꿈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그 폭력의 난장을 기획하고 그곳에 머무르고 그곳에서 눈을 감도록 한 단 하나의 동기이다. 그야말로 “폭력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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