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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전시 이야기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2025.03.06~07.27)



전시를 보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 경우 대부분은 새로운 자극 혹은 감각을 경험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의 평안이나 기분 전환도 전시를 보는 이유이고, 제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되새기기 위해서도 전시를 보러 갑니다. 가끔은 전시 구성이 아닌 전시공간이 마음에 들어가기도 하고요.


오늘 소개드릴《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는 아카이브를 활용한 작품을 통해, 예술가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회 참여 발언을 하며, 현실의 모습을 예술 작품에 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한국 현대 및 동시대 미술 자료를 수집·보존·연구하고 전시와 연계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고 있는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의 2025년 첫 전시이자, 제가 알지 못했던, 알았지만 깊이 알진 못했던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되새긴 전시입니다.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전시 제목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35~475)의 경구인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에서 착안했어요. 강물이 고정불변이 아닌 시시때때로 변하는 대상인 것처럼, 기록 역시 항구적이거나 과거의 것이 아닌, 지금 현재의 기준과 인식 속에서 새롭게 해석될 수 있는 대상임을 의미합니다. '지연하는 기억' '목격하는 기록' '던져지는 서사' 3개의 소주제로 구성된 이 전시엔 7명의 작가와 1팀의 작품 13점이 출품되었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주 4·3 평화재단, 한국퀴어락아카이브 퀴어락이 협업 기관으로 참여했어요.


전시장에서 관람객과 처음으로 눈 맞춤하게 되는 작가는 윤지원으로, 이번 전시에선 두 점의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관심 있게 본 작품은 안쪽에 있는 <무제(강원도 여행)>(2025)으로, 강원도 여행을 통해 강원도라는 지역이 갖고 있는 이념의 대립 및 맥락을 16분 길이의 영상으로 구성한 작품이죠. 윤지원 작가는 "개인적, 집단적 기억을 촉발하는 장소와 매체를 매개 삼아 시간과 공간, 기억과 기록, 매체와 이미지가 복합적으로 겹친 현실을 이미지, 영상, 텍스트로 재조직" 하는데, 이 작품에서도 여행이란 틀 속에 오늘날 일상적 풍경에 남아있는 이전 세대의 기대, 열망, 좌절 등을 다루며 한국의 현대성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요. 이 작품에서 새롭게 알게 된 건 강원도 고성에 이승만 별장과 김일성 별장이 근거리에 위치한다는 점이었고, 해방과 6.25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고 들어왔던 공간과 인식들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에 대한 서술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영상은 작가 촬영 푸티지(footage, 무편집 원본 자료)와 한국 고전 영화, 역사 자료, AI 생성 이미지, 민담 등을 활용해 새로운 이야기를 영상으로 써나갔는데, 정형화된 서술 방식이 아닌 꼬꼬무(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처럼 이야기가 확장되는 매력이 있습니다.

윤지원 작가 인터뷰 영상, 촬영:네버레스홀리다

문상훈 작가의 <FUTURE QUEER IS HERE>(2019)도 인상적이었어요. 이 작품은 'FUTURE QUEER IS HERE'라는 텍스트와 화살표를 아크릴 네온사인을 활용해 인스타그램 포토존으로 만든 작품입니다. 이 아래에서 사진을 찍으면 미래의 퀴어로 기록되는 작업으로, 퀴어와 정상성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문상훈 작가의 작품은 개인 작품 3점과 1점의 협업 작품이 출품되었고 성소수자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퀴어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명칭의 친숙함 만큼 그들이 사회적으로 존재하게 된 맥락, 그들이 사회에서 받는 시선들에 대해서 잘 알진 못하죠. 결국 관련 활동가나 예술가들에 의해 그들의 이야기가 공론화되게 되는데,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작품들을 전시장에서 설치, 영상, 사진 작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 등의 퀴어 문학과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 토드 헤인즈 감독의 《캐롤》, 루카구아다니노 감독의 《콜미 바이 유어 네임》,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 퀴어 예술이 대중의 사랑을 받아도, 문학과 예술 테두리 밖 현실 속 시각과는 여전히 차이가 커 보이니까요. 예술이면 그냥 예술이지, 퀴어 예술로 나누는 것도 그렇긴 하지만요.

문상훈 작가의 <미래의 퀴어가 이곳에 있다> 촬영:네버레스홀리다

문상훈 작가는 이무기 프로젝트에도 참여합니다. 이무기 프로젝트는 '이태원이란 무엇인가 기록하기 프로젝트'의 줄임말로 한남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이태원 트랜스젠더 성 노동자 커뮤니티의 역사를 기록하는 아카이빙 프로젝트입니다. 트랜스젠더들에겐 이태원이란 공간이 '일하고, 친구와 가족을 만들고, 불가능하다고 믿어온 삶을 꾸려나간 역사가 담긴 소중한 공간'이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퀴어 예술가, 연구자, 성노동 운동가 등 6명의 공동작업으로 약 70년간의 역사가 담긴 이태원 트랜스젠더의 삶을 기록해 지도로 만들었죠.

이무기 프로젝트, <트랜스 젠더 시간 지도>.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지도라고 해도 한눈에 맥락이 잘 잡히진 않습니다. 개인의 삶이라고 해도 우리는 늘 사회 및 제도,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게 되기에 그 상호 관계를 역사 연표처럼 정리할 수 없던 이유가 크죠. 하지만 연도가 적힌 가로선을 축으로 타원형으로 분리된 연도들을 따라가면 각 연대별 이슈들을 볼 수 있고, 길게 붙인 직사각형 형태의 바를 색별로 따라가다 보면 실제 인물의 이야기도 읽어 낼 수 있습니다. 시대에 따라 그들의 삶에 영향을 준 내외부 요소들을 보면, '파란만장'이란 단어가 떠오르면서, 제도와 공권력 아래 인간은 참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얼마 전 열린 97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여우주연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을 수상한 영화 《아노라 Anora 》는 성 노동자인 '애니(아노라)'의 이야기입니다. 결은 좀 다르지만, 함께 보면 좋을 듯합니다. 사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작품상을 수상한 포인트가 뭔지를 잘 몰랐는데, 이동진의 파이아키아 리뷰를 보고 나니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작품을 지나면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민간 아카이브 자료 공간이 나옵니다. 이 기록들은 그 자체로도 소중한 유산이지만, 앞서 얘기한 윤지원, 문상훈, 이무기 프로젝트의 작품과도 연계성이 있으니 꼼꼼하게 읽어보길 권합니다. 민간 기록들을 모으는 기관들이 만들어 낸 투쟁과 연대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겨 있거든요.


이 전시에 출품된 영상 중 개인적으로 잔상이 오래 남은 건 임흥순 작가의 <긴 이별>(2011)입니다. <긴 이별>은 제주도 함덕 해변에서 어린아이처럼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을 담아낸 4분 영상으로, 배경에는 영국 프로그레시브 락밴드인 Camel이 1984년 발매한 10집 앨범 마지막 수록곡 'Long goodbye'가 흐릅니다. Camel의 10집 음반은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온 여인을 모티브로 제작된 노래로, 분단 독일의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임흥순 작가의 <긴 이별>.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임흥순 작가는 다양한 사회문제 중에서도 노동자와 제주 4·3 관련한 영상을 많이 제작했어요. <긴 이별>은 두 소재를 다 담고 있죠. 영상은 두 남자의 물놀이를 비추고 있지만, 사실 이 두 남자 중 한 명은 제주 4·3 당시 무장대의 상징적 인물인 이덕구를 다른 한 명은 한진중공업 노동자 노조위원장이었던 김주익이란 인물을 대신합니다.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있던 인물이지만 이 두 인물이 현실의 두 남자처럼 서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작가의 개인적 애도이자 그들을 기리는 헌정 영상이거든요.

<긴 이별>. 촬영:네버레스홀리다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당한 제주 4·3은 서로 다른 이념이 만들어낸 비극으로, 당시 인구의 1/10이 희생당했다고 하죠. 사망자가 3만 명이라는데, 그에 대한 진상 규명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래도 얼마 전 제주 4·3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단 좋은 소식도 있었으니, 꼭 가까운 시일 안에 진상 규명과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이 결점 없이 이뤄지길 바라봅니다. 전시실엔 제주 4·3 평화재단에서 가져온 기록물들도 있으니 함께 둘러보세요.

제주4·3평화재단에서 출품한 제주 4·3 관련 기록물. 촬영:네버레스홀리다

1975년에 자신을 일본군 위안부라 밝힌 첫 증언자의 삶을 기록한 사진 작업인 타카하시 켄타로의 <곁에 머문 부재>(2025)도, 조지 오웰의 『1984』 속 대사에서 작품명을 가져온 나현의 <아무것도 아닐 거야>(2007-2025)도, 알고리즘이 이끄는 삶에 종속적으로 살던 여성의 주체성이 붕괴되는 과정을 드린 김아영 작가의 <딜리버리 댄서의 구>(2022)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 준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나현 작가의 작품은 민족과 민족주의가 전체주의적 통제 수단으로 기능했던 역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품으로, 자국 우선의 정치 및 경제 정책으로 타국을 압박하는 요즘의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아 참 씁쓸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한 작품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는 정말 책 속에만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요.

타카하시 켄타로, <곁에 머문 부재>.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제주 4·3 평화재단 맞은편 유리벽엔 켄타로 작품과 함께 볼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도 있습니다. 촬영:네버레스홀리다
나현, <아무것도 아닐 거야> 출품작 일부 촬영: 네버레스홀리다
김아영, <딜리버리 댄서의 구> 일부 촬영: 네버레스홀리다

전체 작품을 통틀어, 가장 깊게 와닿은 건 권은비 작가의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2025)입니다. 2층에 설치된 작품으로, 옛날 방직기와 검은색 피아노가 결합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무선 헤드폰을 들으면서 감상해야 하는데, 그 안에는 "슬퍼하는 자에겐 복이 있나니"라는 제목의 사운드트랙과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추가된 사운드트랙이 삽입되어 있습니다.

권은비,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 설치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작가는 재난 참사, 산재사망자, 국가폭력 피해자, 불평등한 착취 등을 겪은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를 기록하는 작업을 해왔어요. <폐허의 잔해로 직조한 시> 역시 재난, 자본주의, 죽음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로 재난 참사의 역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했다고 하죠. 작가는 자본주의를 산재의 시작으로 보고, 자본주의라는 말이 처음 태동한 영국, 그중에서도 산업혁명 시기로 시선을 옮깁니다. 그리고 당시 가장 흥성한 방직산업의 이미지를 현실로 가져왔죠. 옛날 방직기 끝은 검은 피아노와 연결되는데, 작가는 이태원 참사 시청광장 분향소에 있던 유가족들의 우는소리가 슬픈 음악으로 들렸다고 해요. 그 말소리, 울음소리가 레퀴엠처럼 들려 브람스 레퀴엠 속 가사인 "슬퍼하는 자에겐 복이 있나니"라는 마태복음 구절을 피아노에 새겨 둡니다. 그렇게 완성된 설치 작품은, 전시 연계 구술 직조 퍼포먼스를 통해 하나하나 완성되어 갑니다. 보면 볼수록, 사운드트랙을 들으면 들을수록 울림이 다른 작품이었어요.

권은비, <공동 세계> 촬영: 네버레스홀리다

전시를 보고 난 후 감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오늘 소개드린 서울시립미술아카이브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전을 보고 난 후 저는, '조금 더 다정한 사회구성원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올해 들어 크고 작은 전시를 30 개 이상 봤는데, 예전엔 예술이 주는 감성적 자극이 좋은 작품들을 더 선호했다면, 확실히 요즘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나 인간 본연에 대한 철학적 사고가 반영된 작품 전시를 더 찾아봤더라고요.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여러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자극을 주는 전시이니, 많은 분들이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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