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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위그《리미널 Liminal》,리움(~07.06)

전시 이야기

'인간과 비인간 사이 상호작용을 시각화하다', 피에르 위그 《리미널 Liminal》 ,리움,(~2025.07.06)


진작 소개를 했어야 했는데 어쩌다 보니 폐막을 앞두고 있네요 ^^:::

그래도 아직 한 주 이상 남았으니, 시간 여유가 된다면 꼭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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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네버레스홀리다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피에르 위그《리미널 Liminal》은 아시아에서 처음 선보이는 개인전입니다.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의 푼타 델라 도가나와의 협력 전시로, 피에르 위그의 대표작 <오프스프링>(2018), <휴먼 마스크>(2014)와 리움미술관이 제작 지원한 <리미널>, <이디엄>, <카마타>(2024-진행) 등 최근 10여 년 간의 작업을 조명하는 작품 총 12점을 지상과 지하층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제게 익숙한 작가는 아니었는데, 홍보 이미지를 보고 '봐야겠다'생각했고, '이미지에 낚이길 잘했구나'라고 생각한 전시였어요. 개막일에 전시를 봤는데, 당일 현장에 꽤 많은 분들이 계셨고, 많지 않은 작품 수임에도 영상, 설치 등 시각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작품들이 많아 대부분 느린 호흡으로 전시를 관람했고요.


전시 설명에 따르면, 프랑스 국립고등예술학교에서 수학한 피에르 위그(1962~, 파리)는, 초기에는 영상 작업에 집중하며 현실과 허구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 왔다고 해요. 실제 마을에서 가상의 축제를 올린 <스트림사이드의 날>(2003)부터 버려진 전통예술박물관을 몇 달간 점거해 일련의 사건을 전개한 <호스트와 클라우드>(2009-2010)까지, 실시간 상황을 현장에 송출하는 형태의 작업을 전개합니다. 우연성을 내포한 현실이 작품의 본질을 구성하는 <경작하지 않은>(2012)이 작업 세계의 전환점이 되었고, <애프터 어라이프 어헤드>(2017)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예측을 피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변종들> (2022)을 통해 프로그래밍 차원으로 작업을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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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품작 <주드람 4> (2011), 촬영: 네버레스홀리다

분명 최대한 쉽게 쓴 설명이겠지만, 이전 작품에 대한 기본 정보가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라, 이 개념만 기억해 두면 좋을 듯합니다. 피에르 위그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주제로, 그 답문에 대한 결과물로서 실시간 상황을 학습하고 변화하며 진화하는 내용을 담은 영상, 설치. 퍼포먼스 형태의 작업을 선보인다.


요즘 영상 작품 설명을 보다 보면 가장 많이 노출되는 용어가 사변적 픽션(사변적 허구, Speculative Fiction)입니다. 대표적으로 <딜리버리 댄서의 구> 시리즈로 관련 분야 최고 상을 수상한 김아영 작가를 들 수 있죠. 사전 정의로서의 사변적 픽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탐구하는 문학 장르"를 포괄적으로 지칭합니다. 과학소설(SF), 판타지, 호러 등의 장르가 포함되고요. 현실 문제나 현상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종종 담기는데, 현실을 바탕으로 가상의 시공간을 창조하는 형태로 작업을 하는 김아영 작가와 피에르 위그의 경우, 사변적 픽션의 형식을 통해 예술로 사회에 저항 및 참여하며,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예술 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죠.


전시 제목 《리미널(Liminal)》은 작가에게 “생각지 못한 무언가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의 작품이 완성된 결과물의 형태가 아닌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체들이 진화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고, 그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 다양한 생명체가 공존하는 복합적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졌으니, 이 안에서 관람객은 불가능하거나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는 또 다른 현실을 목도하게 되는 거죠. 즉, 고정되거나 완결된 형태의 작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개념입니다. 이전에 소개해 드린 서울시립아카이브의 전시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강에 스며든다"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쉽게 다가오겠죠.


전시 출품작들이 다 인상적이었지만, 제게 특히 시각적 충격을 준 작품은 <리미널(Liminal)>(2024~진행 중), <휴먼 마스크(Human Mask)>(2014), <이디엄(Idiom)>(2024~진행 중), <캄브리아기 대폭발 16>(2018)입니다. 전시 타이틀과 동명의 작품 <리미널> (2024~진행 중)은 실시간 시뮬레이션과 사운드, 센서, 스틸 이미지로 구성된 작품입니다. 주 등장인물은 얼굴 없는? 비어진? 인간 형상으로, 전시 설명에서는 "우리의 감각적 현실과 비인간적 존재 사이의 통로이며, 둘 다 인간 형태를 통해 비인간과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전달자(passeur)이자 신탁의 형상(oracular figure)"로 적어뒀어요. 특정할 수 있는 배경도, 인간의 사고도 비어진 이 형상의 움직임과 시선은, 센서가 포착한 환경 조건과 인공 신경 조직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된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형상은 전시 공간에 설치된 센서를 통해 외부 데이터를 학습하고 기억을 쌓아 가기에, 같은 장면이 없는 게 특징이죠. 끝도 없고, 시작도 없어요, 계속 변화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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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네버레스홀리다

특정한 결과물을 기대하지 않아도 시각적 재미가 충분한 영상이니,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오래 봐두시면 좋습니다.


<이디엄(Idiom)>(2024~진행 중)은 움직이는 피사체를 따라가며 작품을 즐기는 형식입니다. 전시장엔 마스크를 착용한 퍼포머가 전시장 이곳저곳을 다니죠. 검은색 의상에 금색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는데, 퍼포머가 착용한 마스크에는 센서가 달려있습니다. 사전적으로 언어, 관용구, 표현양식을 뜻하는 '이디엄'은 이 작품에선 실시간으로 출현하는, 알 수 없는 생성형 언어를 뜻합니다. 인간이 지각할 수 없는 부분을 포함한 특정 정보가 인간의 발성 기관을 통해 특정한 구문과 음소로 변환되는 구조이죠. 처음에는 호기심에 슬쩍슬쩍 보던 관람객들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피사체를 따라가며 그 주위를 채우게 되는데,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해독이 불가능한 언어를 사용하는 대상이기에 우리와는 다른 낯선 곳에서 온 존재라는 인식이 확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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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네버레스홀리다

인공지능으로 실시간 생성되는 목소리를 갖추고 금색 LED 마스크를 쓴 이 퍼포머가 전시장에 상주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제 생각엔 매 시 정각마다 나타나 전시장을 활보하는 거 같은데, 이건 현장 직원분에게 확인을 해보세요. 전시장이 어두운 데다 의상도 어두워서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의외로 금색 마스크가 눈에 잘 들어오고, 매 작품 근거리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고 있어서 한 번은 보실 거예요. 개막일에 본 거라 사전 정보가 없어서 사진을 찍어도 되나 싶었지만, 주변 분들이 다 찍길래 저도 따라 찍었죠. 제재하는 분이 없었고요.


전시 출품작 통틀어서 가장 그로테스크(grotesque) 했던 건 <휴먼 마스크(Human Mask)>(2014)입니다. 19분간 재생되는 이 영상은 후쿠시마 주변 핵 배제 구역이 배경입니다. 영상은 재앙 이후 버려진 도시의 모습으로 시작해, 버려진 식당에서 혼자 생활하고 있는 어린 소녀 가면을 쓴 원숭이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소녀라고 믿고 있던 대상이 가면을 쓴 원숭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 소름이 쫙- 돋기 시작해, 19분을 본 후에도 그 시각적 충격이 오래 남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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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네버레스홀리다

모든 이가 쓰고 있는 '인간'이라는 가면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원숭이가 하는 행동을 눈으로 좇다 보면 분명하진 않아도 어렴풋하게 다가오는 어떤 감상이 생깁니다. 그 감상이 작가의 의도와 모든 분들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와 다르더라도 잔상은 오래가니 꼭 영상 시작부터 끝까지 다 보길 권합니다.


지하 1층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캄브리아기 대폭발 16>(2018)이었어요. 수조에 투구게, 화살게, 아네모네, 모래, 바위가 들어간 이 작품은, 멀리서 봤을 땐 그저 떠 있는 바위 정도라고 생각했죠.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살펴본 후에야 이곳에 생명체가 살고 있단 걸 알았어요. 이 작품에 있는 화살게와 투구게는 생명체의 시작점이 5억 4천만 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 당시 출현한 종(種)이라고 합니다. 원시 상태 이후 형태가 변하지 않아 살아있는 화석으로 간주되는데, 이들은 수명이 다할 때까지 본능적인 행동을 지속하며 번식을 이어간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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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네버레스홀리다

처음엔 저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주변에 계시던 직원분이 말씀해 주셨어요. 그 후에 자세히 보기 시작했는데, 변화하는 과정 자체가 작품이라 그 생명체의 행동을 오래 바라보는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작품도 그렇지만, 이 전시에 처음 시도된 다회용 브로슈어도 인상적이었어요. 이전에는 종이 브로슈어 대신 곳곳에 있는 QR을 찍거나 오디오 가이드를 활용하게 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크고 빳빳한 종이 브로슈어를 들고 들어가서 보고 나온 후 반납하게 했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아주 좋은 변화라고 생각하는데, 다음 전시 브로슈어는 코팅이 되지 않은 조금 더 자연 분해가 잘 되는 소재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긴 했습니다. 설명도 복잡하지 않게 잘 되어 있어 보긴 편했는데, 문제는 작품이 전시된 일부 공간이 어두워 글씨를 전혀 읽을 수가 없었어요. ㅎㅎ 텍스트야 나중에 읽어도 되긴 하니까, 어쨌든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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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네버레스홀리다

이외에도 여러 작품들이 있는데, 읽어내야 할 코드, 디테일들도 있는 데다 작가 작업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잡고 들어가지 않으면 난도가 있는 전시이긴 합니다. 하지만 시각적 자극이 풍부하고, 작품을 단순히 바라보게만 하는 게 아니라 '왜 '라는 질문을 계속 갖고 작품을 바라보게 해서, 관람하는 내내 뇌 운동이 활발해지긴 합니다. ㅎ 그게 매력적이죠. 굳이 다 이해를 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으니, 특별한 시각적 자극이 필요한 분이라면 폐막전에 꼭 다녀오세요.


그리고 이 전시를 본 후에는 현대미술상설전도 챙겨보세요. 작품이 싹 바뀌었거든요. 올해 한 번도 현대미술상설전을 보지 않으셨다면 통합권으로 구매하면 더 저렴하게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려오는 길엔 도로 초입에 있는 페이스(pace) 갤러리에 들러 제임스 터렐 (James Turrell) 《The Return》전도 보시고요.


그럼, 풍성한 하루 보내세요, 전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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