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내년엔 제대로 즐기자! 아시아프→ 삼청나잇→ 키아프리즈→ 프리즈 하우스 서울 (ft. 휠체어, 목발)
한 해 중 제 기대감이 가장 큰 달은 9월입니다.
9월엔 서울에서 문화 예술행사가 넘치도록 열리거든요.
다치고 나서 진짜 속상했던 것 중 하나는, 입장권을 다수 확보해 두고도 6월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 갈 수 없던 상황이었어요. 올 초 출간한 책을 꼭 도서전 출판사 부스에서 보고 싶었거든요. 그럼에도 세 달간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던 건 '잘 회복해서 9월 첫 주 문화 예술행사는 관람하자!'는 목표가 있어서였죠. 물론 생각보다 더딘 회복세에 온전한 걸음은 무리였지만 휠체어와 목발을 최대한 활용해 기다렸던 전시들을 보고 왔습니다. 다녀와서 컨디션 난조로 이후 며칠간 외부 활동을 할 순 없었지만,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기다려온 전시 관람의 시작은 아시아프(ASYAAF)였어요. 아시아프는 '아시아 청년작가 미술축제(ASIAN STUDENTS AND YOUNG ARTISTS ART FESTIVAL)' 줄임말로, 아시아 국적의 청년 작가 아트페어입니다. 올해 18회로, 예년처럼 홍대에서 열리나 했는데 이번 아시아프는 1회 개최 장소였던 문화역 서울 284에서 진행됐습니다. 약 10년 전부터 아시아프 전시 관람을 했는데, 이전에 비해 전시 기획이 더 잘 보였고, 작품 구성도 잘 정돈되어 보기 좋았습니다.
아시아프는 대학(원) 생 및 35세 이하 젊은 작가가 속한 '아시아프'와 36세 이상 '히든 아티스트' 부문으로 구성됩니다. 청년작가 5백여 명을 선정하고 약 1천여 점의 작품을 1, 2부로 나눠 전시했는데, 전시 작품의 현장 구매가 가능하다 보니 제가 전시를 보러 갔을 땐 이미 많은 작품에 '팔렸음'을 알리는 표식이 되어 있었죠. 작가마다 10만 원 균일가 작품을 내어두고, 히든 아티스트 작품을 제외한 출품작 상향가가 3백만 원이라, 잘 고른다면 취향 저격의 작품을 좋은 가격에 살 수 있어요. 앞길이 창창한 젊은 작가들의 작업 취향을 엿보는 학습의 장으로도 좋은 전시고요. 전시 출품작 중 미판매작은 아시아프 홈페이지에서도 구매할 수 있으니, 어떤 작품이 출품되었는지, 어떤 작품이 팔렸는지, 어떤 작품이 남았는지 궁금한 분들은 홈페이지를 참고해 보세요.
문화역서울284에선 전시장에 상시 구비되어 있는 수동 휠체어를 대여해 관람했는데, 건축물 구조상 혼자서 관람하기엔 어려운 점들이 좀 있었어요. 오래된 건축물인 데다 사적이라 유니버설 디자인 적용에 한계가 있었겠지만, 휠체어에 앉아 둘러보게 되니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전시장 오르막과 내리막, 경사로가 힘겨웠어요. 자력으론 움직일 수 없는 구간들이 있어 보호자의 도움을 받았고, 2층 이동 시 탄 엘리베이터 입구도 좁아 휠체어를 탄 채 바퀴를 굴려 진입하면 문틈에 손등이 끼어 까지는 아픔을 감수해야 했죠. 게다가 고정형 브레이크가 아닌 그때그때 손으로 잡아야 하는 방식의 수동휠체어라 불안하고 위험했어요. (아마도 휠체어 사용 경험이 없는 분이 구매하진 않았을까... 요...) 그런 이유로, 전시는 좋았지만, 관람객, 현장 스태프, 보호자의 도움을 받는 구간이 생각보다 많다 보니, 2부 티켓은 페널티를 물고 환불받았습니다. 이후 문화역서울284 전시장 내 수동휠체어를 대여해 공간을 둘러보실 거라면, 꼭 보호자와 함께 가세요.
두 번째 관람은 키아프리즈 위크에 열린 삼청나잇입니다.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키아프리즈)이 열리는 9월 첫 주엔 서울 주요 아트 스폿에서 아티스트 퍼포먼스와 갤러리 야간 개장 등 다채로운 야간 행사가 열립니다. 무료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이 행사엔, 예술 애호가뿐만 아니라 특별한 경험을 원하는 전 연령대의 분들이 찾아와 저녁 6시부터 자정까지 마음껏 즐기죠. 올해도 9월 1일부터 4일까지(1일 을지로나잇, 2일 한남나잇, 3일 청담나잇, 4일 삼청나잇) 평일 저녁 예술 애호가들을 설레게 하는 'OO 나잇'이 열렸습니다. 서울의 이름난 예술 스폿에서 열린 이 행사는 지역 및 공간 구조상 휠체어 접근이 불가해, 저는 최소한의 목발 도보로 안전하게 볼 수 있는 곳인 삼청나잇만 다녀왔어요.
삼청나잇의 주요 스폿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있는 그 라인상의 모든 갤러리로, 그 외에도 삼청동 일대 주요 갤러리 및 미술관 20 곳에서 야간 개장, 무료 관람, 드링크 리셉션, 파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습니다. 사람이 많을 거라 많이 볼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고, 목발로 안정적으로 전시를 볼 수 있는 곳을 택하다 보니, 갤러리현대, 금호미술관, 학고재 전시만 보고 돌아왔어요. 음식이 제공된 국제갤러리엔 너무 많은 분들이 줄을 서 계셔서 관람을 포기했고요.
현재 갤러리 현대에선 'One after the Other'(~2025.10.19)라는 제목으로 김민정 작가 개인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2021년 이후 개인전이라 더 반가웠어요. 불에 그을린 한지를 한 장 한 장 이어 붙여 만들어진 작가의 형상은 현장에서 봐야 그 오묘한 느낌이 더 실감 나게 다가오기에 현장 방문은 필수입니다. 개인적으론 <Mountain> 시리즈를 좋아하지만, 갤러리 1층에서 선보인 신작 <ZIP> 시리즈, 지하 1층에 전시된 대표 연작 <Mountain>과 <Traces>, 2층의 <Encountwe>, <Predestination>, <Firework> 등 2022년부터 2025년까지의 다양한 작품들이 있어 좋았습니다.
금호미술관에서 본 유현미 작가의 'Hybrid Realty'(~2025.09.28)도 재밌었고요. 유현미 작가는 실제 공간에 사물을 배치하고 그 배치된 사물에 색을 입혀 사진으로 찍는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그러다 보니 공간과 장소는 실재여도 찍힌 대상이 실재 같지 않은 느낌을 주죠. 색을 입혀 찍는 대상은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적용되는데, 전시 출품작에도 이와 관련한 작품과 영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유료 전시지만, 4층 전관에서 작품을 볼 수 있고 작품이 좋으니 근처 갈 일 있으면 꼭 챙겨 보세요.
삼청나잇 땐 이곳을 찾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전시도 생기고, 갤러리 내외부에서 시음회나 시식회 등의 부속 행사도 진행되어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도 많습니다. 전시만 조용히 보고 싶다면 다른 날에 가는 게 맞아요. 하지만 예술 애호가들의 파티 문화를 경험해 보고 싶거나 어떤 분위기인지 체감해 보고 싶다면, 이 날이 제격입니다.
참고로, 행사를 끝까지 즐기고 싶다면 간단하게 배를 채우고 가는 게 좋습니다. 시음이나 시식이 제공돼도, 줄을 길게 서서 대기를 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갤러리마다 준비되는 시간이 달라 금방 방전될 수 있거든요. (저도 친구랑 김밥을 먹고 갔어요~) 술을 마실 기회도 적진 않고, 가벼운 현장 이벤트 참여할 기회도 생기니, 내년 이맘땐 체력 빵빵하게 충전해서 꼭 제대로 즐겨보세요.
아트 위크의 메인은 누가 뭐래도 키아프리즈입니다. 키아프와 프리즈 서울이 열리는 코엑스엔 VIP 관람객 외에도 일반인 관람객의 발길이 이어지죠. 올해는 코엑스 1층 AB 홀에서 키아프가, 3층 CD 홀에서 프리즈 서울이 열렸습니다. 키아프리즈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9월 한 달간 진행되는 대한민국 미술축제 홈페이지를 통해서도 행사 몇 달 전에 할인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미술축제 홈페이지에서는 전국 비엔날레 티켓도 할인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고, 아트 투어 프로그램도 예약할 수 있으니 참고하시고요. 단, 키아프 티켓을 사면 키아프 서울을 본 후에 프리즈 서울 전시장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입장권을 따로 살 필요 없이 하나를 사면 다른 하나를 더 볼 수 있는 구조거든요. 단, 프리스 서울이 키아프 보다 하루 먼저 끝나니, 티켓을 살 땐 날짜 확인 및 볼 수 있는 전시 종류를 꼭 확인하셔야 합니다. '키아프 ONLY'라고 되어 있는 건 말 그대로 키아프만 볼 수 있는 표니까요. 키아프든 프리즈 서울이든 전시장 출입 때마다 출입 증명을 위한 바코드 태그는 공통으로 진행됩니다.
작년엔 5시간 넘게 키아프리즈를 봤는데, 올해는 아무래도 이동이 불편하다 보니 통로 위주로 걸으며 2시간 정도 보고 나왔습니다. 갤러리 부스가 개방형이라 복도만 잘 따라 걸어도 어지간한 작품들을 볼 수 있지만, 못 보는 작품이 있긴 해요. 전시 작품이 마음에 들면 갤러리 부스 안으로 이동해서 봤지만, 대부분은 예전에 봤거나 작업 방식이 익숙한 작품들이라 출품작 분위기를 보는 정도로 관람했습니다.
대부분 갤러리 소속 작가이거나 전시했던 작품 중 주력 작품을 선별해서 나오는 거라, 전시를 꾸준히 다양하게 봐왔다면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키아프리즈 작품이 아주 새롭게 다가오진 않습니다. 미술시장 트렌드 확인 차원에서 다녀오는 거죠. 올해 전시 관람 후엔 '내년엔 쉬었다가 다음 해에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코엑스에서도 수동 휠체어 대여는 가능합니다. 단지 행사장이 넓고 여러 설비로 바닥이 고르지 않은 부분도 있어서 휠체어로 전체를 다 돌아보긴 힘에 부치실 거예요. 저는 목발을 사용했는데, 다니다 보니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분이 좀 계시더라고요. 어찌나 부럽던지... ㅎ
프리즈 하우스 서울의 'UnHouse' 전시는 10월 2일까지 볼 수 있습니다. 올해 처음 선보이는 프리즈 하우스 서울은 오랫동안 방치된 주거용 건물을 전시장으로 개조했어요. 원래 건물 내부 구조를 몰라 어떻게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외관만 봐도 건축가의 세심한 고려가 있었던 집이란 생각이 들고, 중정, 창문, 테라스, 내부 계단, 타일 유리창, 천장과 바닥, 방과 방 사이 복도 등 내부 공간도 멋있습니다. 건물 내외부만 돌아봐도 좋은 공간입니다.
전시 'UnHouse'는 "퀴어 아티스트의 시선으로 '집'을 해체하고 다시 짓는 전시"입니다. 어떤 작품을 가져다 놓아도 다 포용될 것 같은 장소라,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 테라스, 중정까지 놓인 56점의 작품이 장소에 잘 스며들었어요. 장소가 크진 않고 영상 작품도 많진 않아 30분 정도면 관람하실 수 있어요.
프리스 하우스 서울은 장충체육관을 조금 지난 동호동 골목에 있습니다. 약수역에서 가까워요. 참고로, 언덕 위의 집이라 완만한 경사로를 올라야 하고요. 내부에선 계단 이동을 해야 해서 휠체어로는 접근이 힘들고, 목발로는 가능합니다.
요즘 전시와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어느 정도 시설이 갖춰진 전시장과 공연장이라고 해도 몸이 불편한 관람객을 위한 준비가 생각만큼 되어 있진 않단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살다 보면 우린 모두 사고로 예상치 않은 장애를 일시적이거나 장기간 겪을 수밖에 없고, 도움이 필요한 노약자가 될 수밖에 없는데, 그에 대비한 설비나 인식도 부족하고요. 국공립, 시립 산하 기관엔 기본적으로 이런 설비가 갖춰져 있다고 알고 있지만, 보장구가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고 해도 휠체어를 대여하러 가는 길이 멀어 대여를 포기한 적도, 막상 대여를 했다 해도 지역 구조랑 맞지 않아 자력으로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그나마도 한두 대만 있어 구경도 못한 경우도 있었고요. 한 공연장에선 제 목발을 보더니 별 뜻 없이 '밖에서 보관해 드릴까요?'란 말도 하셨어요. '공연장 내 객석 계단 내려갈 때 필요해서 사용하겠다'라고 가지고 들어갔지만요.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죠. 직접 겪지 않으면 그 불편함을 알 수 없고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먼저 경험하고 의견을 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더 적극적으로 다녀볼 생각입니다. 휠체어를 타고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면, 그에 맞게 우리 사회도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뀌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