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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자, <호흡-선혜원>(~2025.10.19),선혜원

전시 이야기

이곳이 별천지구나! 김수자, <호흡-선혜원>(2025.9.3-10.19), 선혜원



금방이라도 증발되어 버릴 것 같던 바삭바삭한 여름이 가고, 혹시 올 순서를 잊어버린 건 아닌가 의아했던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저희 동네는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반팔 반바지보다는 긴팔 긴 바지를 찾게 되었고, 잘 때도 살짝 도톰한 이불을 덮고 있어요. 그간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라 습윤한 바람이 조금만 스쳐도 감기 기운이 돌아 감기약도 벌써 두 번이나 먹었고요. 다리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려 음식 조절로 체중을 낮춰보려 했는데, 몸이 흐물거린다는 체감이 올 때가 종종 있어 최대한 잘 챙겨 먹고 있습니다.... 요즘 식비가 정말... ㅎ


일주일에 평균 두세 번 대중교통 이동 적응 중인데, 근래엔 비가 자주 와서 생각만큼 다니지는 못했어요. 평지나 계단은 걷지만 아직 발목이 온전하진 않아서 단차가 큰 계단이나 오르막길, 경사로에선 목발의 도움이 필요하거든요. 걷는 속도가 예전보다 빨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부자연스럽고 보통 걸음보다는 느려 지인들과 걸을 때면 '먼저 가서 쉬고 있어, 곧 갈게'란 말이 입에 뱄죠. 그래도 천천히 걸으며 파란 하늘도 드라마틱한 구름도 보니, 좋네요.


오늘 소개할 전시는 삼청동 선혜원(鮮慧院)에서 열리고 있는 김수자 작가의 <호흡-선혜원>입니다.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죠. (이 표현 정말 오랜만에 써보네요 ㅎ) 작가 김수자(1957-, 대구)는 회화, 바느질, 설치, 퍼포먼스, 영상, 빛과 소리, 건축 등 다양한 형식과 매체로 작업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입니다. 올해 7월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인 ‘오피시에 Officier de l'Ordre des Arts et des Lettres’도 받았죠. 참고로, 1957년 프랑스 문화부가 제정한 문화예술공로훈장은 예술과 문학 분야에서 탁월한 창작 활동을 펼치거나 영향을 미친 인물에게 주는 영예로, 슈발리에(Chevalier), 오피시에(Officier), 코망되르(commandeur, 최고 등급) 세 등급으로 나뉩니다.


<호흡-선혜원>은 그가 10년 만에 고국에서 여는 전시이자 1968년 SK그룹 창업주 사저였던 선혜원에서 열리는 첫 전시라 더 많은 분들이 이곳을 찾고 있어요. 현재의 선혜원은 사저에서 인재 교육원을 거쳐 2025년 4월 그룹 연구소 겸 컨벤션 공간으로 변화했지만, 사저였을 당시 기본 골격은 그대로라 당시에도 꽤 멋진 공간이었을 거라 추측됩니다. 찾아보니 온지음 집공방에서 선혜원 리모델링 프로젝트 전체를 주관 및 기획했고, SKM, BCHO 사무소와 협업하여 한옥과 현대 건축이 조화를 이루는 공간을 완성했다고 해요. 전통 건축과 현대 건축이 최적의 어울림을 보여주는 곳으로, 날씨까지 받쳐준다면 별천지라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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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원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이번 전시는 ‘선혜원 아트 프로젝트’ 첫 전시로, 이미 전시 종료일까지 모든 사전 예약이 마감되어 볼 기회가 귀해졌어요. 취소표도 거의 나오고 있진 않아 벌써부터 다음 전시를 기다리는 분도 많고요. 재밌는 건, 이곳을 오신 분들 대부분이 다른 분들의 방문 후기를 읽고 오셔서, 예약 확인 후 선혜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어디 어디를 꼭 봐야 한대'라며 전시공간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신다는 거죠. 저는 정보 없이 갔는데 워낙 걸음이 느리다 보니 주변 얘기가 정보로 점점 쌓이더라고요.


선혜원 내에는 세 채의 한옥(경흥각, 하린당, 동여루)이 있습니다. 건물 포치는 반전된 "ㄷ"형태로, 계단을 올라 바로 보이는 건물이 경흥각, 오른쪽이 하린당, 경흥각 맞은편에 동여루가 있습니다. 전시는 경흥각과 하린당 지하 1층과 지상 1층에서 볼 수 있고, 선혜원의 대문 역할을 하는 누각인 동여루에선 준비된 컵에 물도 마시고 휴식도 취하며 맞은편 경흥각과 하린당을 조망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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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네버레스홀리다

중심 공간인 경흥각은, '성취'와 '부흥'의 의미를 담은 선혜원의 상징적인 전각입니다. 겉에서 봤을 땐 이층이지만 실제 내부는 확 트여있죠. 전통 비례미를 살린 목조 건축물로, 웅장함과 디테일 모두 잘 갖췄습니다. 이곳에 설치된 '호흡-선혜원'(2025)'은 거울 패널을 이용한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으로, 경흥각 내부를 시공간을 초월한 예술세계로 탈바꿈했죠. '호흡'시리즈가 전통 한옥에 설치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SE-f17a3ab3-b4ba-4a0b-a990-6949ac87a6f7.jpg?type=w773 경흥각 내부 촬영=네버레스홀리다

비워진 한옥 내부, 바닥이 있어야 할 곳에 거울로 반사된 천장, 균형을 깨뜨리며 그 사이 어딘가 위치하게 된 관람자의 모습 모두 색다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는데, 그 느낌이 꽤 몽환적입니다. 관람객이, 만화경 사이에 흩어진 색지 같아 보이거든요. 특히 7m 높이의 천고와 사방을 수직과 수평으로 수놓은 목재의 멋이 그대로 담겨 더 인상적이죠. 확실히 건축물 규모가 크고 천고도 높아 바닥 거울 패널에 비친 모습이 더 극대화되어 다가오는데, 관람객들이 수시로 들어와 공간을 채우다 보니 생각보다 몰입해서 보긴 어려워요.

IMG_6896.JPG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전시 작품 유지를 위해 관람객은 경흥각 내부 진입 전 입구에서 신발 위에 덧신을 신어야 해요. (짧은) 치마를 입은 분들을 위한 천도 별도로 준비되어 있고요. 내부에선 원하는 만큼 머물다 나와도 되는데, 여기저기 영상 및 사진을 찍는 분들이 많아 피해서 감상하는 것도 나름 미션이라 저는 한 바퀴 크게 돌고 나왔습니다. 사람이 비교적 적은 시간에 가시면 텅 빈 몰입의 공간에서 수직과 수평, 빛과 공기의 움직임 등 작가가 의도한 '호흡'의 실마리들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경흥각을 본 후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먼저 가세요. 참고로, 나란히 놓인 엘리베이터 안에도 작품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한쪽은 태양, 한쪽은 달로, 운이 좋아 양쪽 엘리베이터 문이 동시에 열리면 이 두 개의 설치작을 한 번에 볼 수 있죠. 근데 그런 기회는 거의 없을 듯하니, 내려갈 때와 올라갈 때 각각 다른 엘리베이터를 탑승해 보세요. 이 장면을 사진 찍으려는 관람객이 갑자기 눈앞에서 멈춰 설 수 있으니 조심하시고요.

SE-db090173-89e4-4689-844d-10ec30f2c3a4.jpg?type=w773 촬영=네버레스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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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네버레스홀리다

지하 회랑엔 김수자 작가를 대표하는 연작 중 하나인 '보따리'(2022)가 놓여 있습니다. 헌 이불보와 옷으로 만든 보따리는 작가에게 이동, 정체성, 기억에 대한 상징성을 지닌 한국 전통 생활 도구로, 작가는 여성의 노동과 경험이 축적된 이 일상의 오브제를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역사를 상징물로 보여줍니다. 보따리가 설치된 곳은 멀리서 보면 커다란 문틀이 겹쳐진 형상으로 비치는데, 그 문 앞에 놓인 색색의 보따리는 정착과 이동을 반복하는 보금자리처럼 보여 이주와 디아스포라, 문화적 충돌 및 만남 등 작품이 지닌 상징성을 제대로 보여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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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네버레스홀리다

예전에는 바느질, 보자기와 같은 소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김수자 작가를 비롯해 바느질, 보자기 등 전통 여성의 서사를 간직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매체로 작업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며, 서로를 이어주고 메꿔주는 '바느질'과 묶는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는 평면 조각인 '보자기'가 얼마나 무궁무진하게 활용 및 확장 가능한 매체인지를 알게 됐죠. 그렇게 한국 여성 및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우리가 겪은 전쟁과 상흔의 역사, 정착과 이동이란 다양한 개념이 담긴 보따리는, 놓인 곳에 정착했더라도 벽돌이나 시멘트로 지어진 집과 달리 누구나 이동시킬 수 있다는 연약함과 취약함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지하엔 '보따리' 연작만 소개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 들려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화장실이에요. 여러 개의 화장실 안에는 각각 단독 구성으로 작품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건 장애인 화장실로, 두 개의 널찍한 화장실엔 엘리베이터 내부처럼 한 쌍으로 보이는 작품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일반 인테리어로 보긴 어려운데, 따로 설명이 되어 있진 않아 아쉬웠어요. 나중에 공간 투어가 생긴다면, 그땐 꼭 리모델링하면서 바뀐 공간들과 예술작품 설치 콘셉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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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화장실 일부 촬영=네버레스홀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돌아와 복도를 따라 동여루 방향으로 가면, 그곳에 '연역적 오브제-보따리'(2023)와 '땅에 바느질하기: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 백자 작품이 있습니다. 이곳은 로비 공간으로, 벽면에 있는 '땅에 바느질하기: 보이지 않는 바늘, 보이지 않는 실'은 마르지 않은 백자토에 바늘을 사용해 구멍을 뚫고 불규칙한 질감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작품 설명에 따르면 "바늘로 백토판을 관통해 빛의 구멍을 뚫은 작품으로 자연의 에너지와 창조의 우연성을 상징"한다고 해요." 작가에게 있어 바늘은 따로 떨어진 것을 이어 줄뿐만 아니라 만남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인간 존재의 흔적, 이동, 문화적 경계를 개념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수평의 대지가 되는 점토판에 수직 활동을 하며 구멍을 내는 바늘을 사용해 보이지 않는 실로 기능하는 빛을 투과시켰는데, 벽면 부착이 아닌 다른 형태의 디스플레이였다면 이점이 조금 더 관람객에게 잘 전달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얀 벽에 하얀 작품이 걸려있으니 생각만큼 의도가 잘 전달되진 않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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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네버레스홀리다

'연역적 오브제 -보따리'(2023)는 조선백자의 상징인 달항아리를 모티브로 독일 마이센 도자기와 협업해 제작된 백자 작품입니다. 실제 달항아리처럼 그릇의 테두리가 정교하게 맞춰져 하나의 몸체로 보이는데, 다른 점은 항아리 입구가 막혀있다는 거죠. 작가의 대표 작업인 보따리 작업의 철학을 확장한 작품으로, 다양한 생각과 감상을 담을 수 있어 좋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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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네버레스홀리다

이 작품을 본 후엔 통로를 따라 동여루로 가시면 됩니다. 앞서 말했듯 관람객 휴식 공간으로, 물 한잔 드시며 쉬어가도 되고, 차경으로 보이는 경흥각과 하린당을 조망해도 좋고요. 시간 여유가 된다면, 지나왔던 길을 다시 한번 더 돌아보고 나와도 좋습니다. 또 언제 개방될지 모르고, 건물 구석구석 볼만한 디테일도 많거든요. 지상 1층 화장실도 꽤 괜찮게 꾸며놨고요. ㅎ 다음 방문이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땐 이번에 개방하지 않은 하린당 2층과 출구 맞은편 건물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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