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이야기
수공예적 추상 조형물에 담긴 긴 호흡의 걸음, 《마크 브래드포드 MARK BREADFORD: KEEP WALKING》, (2025.8.1~2026.1.25), APMA
오늘 소개할 전시는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마크 브래드포드 MARK BREADFORD: KEEP WALKING》입니다. 해설이 적절하게 잘 되어 있는 데다 작품이 큼직큼직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요소가 많은 전시예요. 개인적인 얘기를 덧붙이자면, 목발과 휠체어 없이 본 첫 전시입니다, 물론 통증은 따랐지만요. 개막 전부터 보고 싶었던 전시였는데 발목 상태가 여의치 않아 내내 못 가다 친구의 살뜰한 배웅으로 다녀왔어요. 관람료가 얼리버드나 에누리 없이 성인기준 16,000원이지만, 전시 출품작이 좋고 부가적으로 볼 수 있는 전시와 상설 설치작도 있어 돈과 시간이 아깝진 않습니다.
국내 처음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라는 이번《Mark Bradford: Keep Walking》전은 독일 베를린 함부르크반호프 미술관에서 선보인 순회전의 연장선으로, 회화, 설치, 영상 등 40 여 점의 작품이 출품됐어요. 전시 출품작도 좋지만, 스위스 기반의 세계적 갤러리인 하우저 앤 워스(Hauser & Wirth)가 프리즈 서울 2025에 출품한 마크 브래드포드의 '오케이, 그래 내가 사과할게(Okay, Then I apologize)'(2025, 3점 연작)가 개막 첫날 62억 7000만 원에 판매되어 '마크 브래드포드' 이름에 화력이 더해지긴 했죠. 프리즈 서울에서 꼭 봐야 하는 작품 1순위로 꼽힌 작품이었고, 결과적으로 가장 높은 가격에 팔린 작품이었으니까요.
미국 로스앤젤레스 출신 작가 마크 브래드포드(1961~)는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지, 신문지 등을 겹겹이 쌓은 후 긁어내거나 찢는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작가는 흑인, 퀴어, 도시 하층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경험을 작업의 핵심 토대로, 도시의 부산물을 회화의 재료로 사용하며, 인종, 계층, 젠더, 도시 공간의 복잡한 문제들을 추상회화로 풀어낸다'는 전시장 설명이 그의 작업 스타일을 잘 요약했죠. '사회적 메시지를 회화의 재료와 질감을 통해 구현하는 '사회적 추상화'를 개척한 동시대 작가'로, 30대에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고, 2017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대표 작가, 2021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2024년 아트리뷰 'Power100' 19위에 선정되는 등 인지도도 세계적입니다.
이번 APMA 전시 출품작은 40 여 점으로, 작품 하나가 한 섹션인 경우도 있고 다른 제목을 가진 연작을 한 섹션에 함께 배치하기도 했어요. 한 시간 정도면 작품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지만, 설명을 보지 않거나 작품과의 교감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생각보다 더 금방 나오게 되죠.
가장 인증숏을 많이 찍는 곳은 첫 섹션 작품인 '떠오르다(Float)'(2019)입니다. 로스앤젤레스 작업실 주변 거리에서 수집한 전단지, 광고 포스터, 신문지 등을 길게 재단하고 노끈으로 이어 붙여 전시장 바닥 전체를 덮는 회화적 설치물로 재구성한 작품이죠. 긴 색면들이 교차되며 넓은 전시장 바닥을 가득 채운 이 작품은 거대한 규모에 화사한 색상이 더해져 시각적인 즐거움이 큽니다. 관람객이 작업 위를 걸으며 감상하는 방식이라, 걷는 동안 바삭거리는 소리와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미묘한 감각도 함께 느낄 수 있는, 오감 접촉이 가능한 회화 작품이에요.
보통 회화라고 하면 캔버스나 종이 위에 그린 작품을 떠올리는데, 사실 정형화된 캔버스의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형식의 회화작품을 선보이는 작품은 이미 많습니다. 하지만 그 위를 걷게 한 작가는 언뜻 떠오르지 않을 만큼, 드물죠. 고정된 틀을 벗어나 다른 형식으로 설치되다 보니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도 다양해지는데, 저는 작품 위를 자유롭게 걷다가 마음에 드는 구도가 나올 때마다 개인 핸드폰 사진틀 안에 이 작품을 다양한 구도로 담아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감상했습니다.
'떠오르다'도 인상적이었지만 전시 작품 중 제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엔드 페이퍼 end papers' 연작입니다. '엔드 페이퍼(end papers)' 연작은 작가의 첫 번째 작업이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해요.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재학 중 회화의 재료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했고, 그때 유년시절 어머니의 미용실에서 흔히 봤던 파마용 반투명 종이인 엔드 페이퍼(end papers)를 작품의 주재료로 활용하기 시작했다고 하죠. 펌을 해본 분들에겐 익숙한 그 반투명 용지의 가장자리를 토치로 태워 테두리를 검게 그을린 후 용지를 캔버스 위에 줄지어 나열해 구성된 콜라주 연작으로, 염색약으로 물들인 2003년 초기 작업부터 2024년 최신 작업까지 전시했어요.
이 작품은 구성의 변화가 주는 미묘한 리듬과 농담의 조화와 말끔하게 비어진 직선의 빈 공간이 주는 쾌감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노동 강도와 시간에 대한 경외감도 느껴지고요. 이 작품은 멀리서, 아주 가까이에서 보시고, 그 후에 마음에 드는 부분을 찍어 사진으로 다시 보면, 감상이 또 달라집니다.
엔드 페이퍼 연작이 있는 곳 바닥엔 2023년 작품인 '데스 드롭(death drop)'이 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신체를 본떠 32% 확대해 만든 조각으로, 퀴어 볼룸 문화에서 파생된 퍼포먼스 동작 '데스 드롭'에서 제목을 가져왔다고 해요. 열두 살 때 울타리에서 뒤로 넘어진 순간을 촬영한 영상에서 영감을 받았다는데, 가까이에서 보면 영락없는 성인의 모습이긴 합니다. 물론 낙하 포즈는 충분히 공감이 갔고요. 보기만 해도 통증이 느껴진 작품이었어요, 제겐.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2023) 도 인상적입니다. 전단지에서 차용한 "조니가 집을 삽니다(JOHNNY BUYS HOUSES)"라는 문구를 새긴 이 작품은, '즉시 현금 지급'을 미끼로 취약 계층으로부터 주택을 사들인 투기 자본의 현실을 표현했다고 해요. 미국이 토착민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했던 19세기의 이념을 제목으로 설정해 오늘날 도시의 부동산 투기 현실을 비판적으로 보여주는데, 너덜너덜해진 종이 박스와 겹겹이 쌓인 레이어가 부서진 표면에서 집을 잃은 사람들의 무너진 심정과 갈가리 찢긴 희망이 비치기도 합니다.
제가 가장 오래 머물렀던 작품은 '타오르는 피노키오(2010)'입니다. 사실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는 공간인데, 벽에 부착된 신문지와 조명, 공간에 울려 퍼지는 낸시 윌슨의 'tell me the truth'이 묘하게 사람을 붙잡아 두죠.
이 작품은 전시장 초입에 있는 설명을 꼭 읽고 들어가야 작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메시지가 가득 담긴 작품이고, 색과 빛, 종이라는 물성이 지닌 시각적인 임팩트도 강한 데다, 읊조리듯 묻는 낸시 윌슨의 "tell me the truth"가 관람자에게 어떤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거든요. 이런 복잡한 관계와 상관없이 공간이 주는 묘한 힘이 있어 정서적으로 꽤 안정감을 주기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미국 근현대 역사 속 이주의 역사를 조명한 작품들도 좋았습니다. 작가는 자연재해, 질병, 인종 차별, 젠트리피케이션 등 불가항력의 상황에서 소외된 약자들의 이동을 기록해 왔어요. 그중 하나가 미국 남부의 인종 차별과 폭력을 피해 북부와 서부로 이동했던 600만 흑인들의 '대이주'를 소재로 한 '기차시간표'이죠. '기차시간표'연작은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에서 인용한 문장을 제목으로 썼어요. 30~40년에 걸친 대이동을 기차 시간표의 형식을 빌려 회화로 구현한 이 작품엔 짐 크로 법(Jim Crow laws), 사회불안, 쿠 클럭스 클랜(KKK)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 담겼지만, 작가는 그 외에도 정치적 이유, 성 정체성, 경제적 사정 등 이주를 발생시키는 다른 사유도 작품에 담았습니다.
'기차시간표'와 '신발사이즈'연작이 있는 전시실 중앙엔 서로 다른 크기의 지구본이 걸려있습니다. 이 작품 역시 서로 다른 크기를 통해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빚어낸 차별을 다뤘다고 해요. 지구본 작품은 꽤 흥미로웠는데, 같은 지구이지만 각각 다른 크기의 설치물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제대로 표현은 되었는지, 세계 전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지 찾게 되더라고요. 그 과정이 재밌긴 했지만, 전 지구적 사회와 권력의 불균형을 담고 있는 작품이란 의미 위에서 봤을 땐 씁쓸했어요. 종이로 만든 조각이라 화재에 극히 취약한 작품으로, "그는 잿더미의 왕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라가 타오르는 것을 볼 것이다"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빌려온 대사의 제목이 주는 섬찟함이 있거든요. 불탄 대륙의 모습에서, "우리가 같은 행성에 살아도 결코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지 않다"는 팩트가 주는 음습한 기분도 느껴졌고요.
이번 APMA전시를 위해 새롭게 구상된 연작도 있습니다. '폭풍이 몰려온다'(2025)는 역대 최악의 허리케인으로 불리는 2005년 카트리나가 남긴 재난과 정부의 미숙한 대응을, 미국 역사상 최초의 드래그 퀸으로 알려진 윌리엄 도어시 스완(1858-1925)의 삶과 병치시켜 만든 연작입니다. 전시장 벽체엔 검은 벽지와 종이 표면을 산화시켜 만든 금빛 주름을 붙여 난폭한 폭풍의 결(폭풍이 지나간 흔적)을 표현했죠. 캔버스에 투영된 스완의 형상 위엔 미국 래퍼 케빈 게이지 프로디지의 곡 가사를 스텐실로 더했는데, 유령처럼 부각되는 스완의 형상에 거칠게 표현된 텍스트가 덮여있고 , 공간 전체는 사나운 폭풍이 몰아친 듯한 격렬함이 전해져 뭔가에 훅 휩쓸렸다가 빠져나온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작가의 작품은 여러 겹의 레이어와 작품에 사용된 제목, 소재를 이해해야 더 잘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전시를 설명문을 꼼꼼하게 읽으며 한 번, 자유롭게 걸으며 또 한 번, 그렇게 두 번 봤어요. 그렇게 봐도 시간이 한 시간 남짓 되더라고요. 사회적 메시지가 가득한 작품이지만 작가의 작품 경향을 파악하고 나면 감상에도 속도가 붙으니, 여러분들도 이 방식으로 보길 권해드립니다.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은 해외 작가의 단독 전시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각만큼 자주 오지 않으니까요.
그럼 오늘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