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돌아가신 후에 제일 후회된 것이 아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사춘기 때는 아빠에 대한 미움이 커서 알고 싶지 않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내 생활만 중요해서 더욱 관심 갖지 않았는데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책이나 영화, 드라마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죽음에 아빠가 맞닿아 보여 많이 슬펐다.
최근 본 영화 어쩔수가없다 에서 실직한 가장들이 마인드 컨트롤하는 장면에 눈물이 터졌었는데 90년대 초 실직으로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했던 아빠의 1~2년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지... 아빠가 아프시기 전에 이야기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움과 무관심으로 끝났던 부녀관계를 후회해도 이미 늦어서 되돌릴 수가 없다.
언니들이랑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늦둥이 딸이라 내가 한참 클 때 엄마는 이미 힘든 현생보다 성당에서의 시간이 더 중요했고 아빠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냉랭했었다. 다섯 식구가 온기를 나누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에 나 역시 가족에 대한 기대도 궁금증도 없었던 시기였다. 한동안 난 왜 이렇게 과거에 매여있어야 할까, 왜 어린 시절 갖고 싶었던걸 소장하려고 애쓸까, 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까... 열등감, 자기 연민에 빠진 게 부끄러웠는데 타자기를 만나고 해소가 된 것 같다. 나 혼자라도 끄집어내고 싶어서 일기처럼 쓴 글을 보였을 때 더는 부끄럽지 않고 내 이야기 속에 다른 가족들이 보였다. 내가 반질반질한 수치심을 느꼈을 때 교복을 사주지 못한 중년의 엄마 맘이 어땠을지, 엄마가 왜 자꾸 성당에서 기도만 했던 건지 이해가 되었다. 잘 쓰지도 못하는 글을 자꾸 쓰고 싶었던 이유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거였나 보다.
*반질반질한 수치심 *
https://brunch.co.kr/@ming/139
중년이 된 내가 부모님의 인생을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고 안타깝다. 원망스러웠던 일만 오래오래 기억하느라 꾸준했던 사랑을 읽지 못한 게 죄송해서 나는 내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남은 가족에게 같은 실수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올 1월에 처음으로 다 같이 가족 여행을 했었는데 공통된 추억이 있어서 더 가까워졌다. 그동안은 친근하긴 했지만 서로에 대해 자세히는 알지 못한 다른 시간을 살던 가족 같았는데...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언니들과 엄마는 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년 11월 가족에 대한 인터뷰를 하기로 결심했다. 내 생일이 11월 중순이라 매년 나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질문지를 만들었다. 일부러 유치한 질문도 섞어서... 내년에는 올해 한 인터뷰에서 변화한 것이 있는지랑 새로운 질문들을 추가해야지. 생각보다 가족 모두가 진심으로 참여해 주어서 고마웠다.
먼저 남편을 인터뷰해 봤는데 25년을 알았지만 처음 알게 된 이야기들이 있어서 신기했다.
어릴 적 좋아했던 간식 중에서 다시 먹고 싶은 게 있다면?이라는 질문에 돈부과자라고 대답했는데 나는 전혀 모르는 이름이었다. 검색해 보니 뭔지 알겠어. ㅋㅋㅋㅋ 그걸 좋아했었구나!
지난 일요일 친정에 갔을 때 엄마, 언니들을 인터뷰했다. 정말 너무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처음 해보는 일대일 인터뷰 되게 민망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언니들 생각은 다르려나?) 너무 어렵다면서 고민 먼저 하다가 시작된 이야기가 쌓이고 쌓여 금방 웃고 울며 여운을 남겼다. 수박 겉핥기처럼 시작된 이야기지만 앞으로 더 많이 공유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엄마의 어린 시절, 친구와의 일화,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 엄마가 현재 젤 좋아하는 간식, 좋아하는 향 등등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엄마는 요즘 마가레트라는 과자를 제일 즐겨 드신다고 해서 담에 만나면 드리려고 마가레트를 사놨다. 외할아버지 이야기하면서 눈물흘리시는 엄마를 보고 나도 눈물이 났다.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엄마의 대답이 술 먹은 사람이라고 답하신 것도 참 가슴 아팠다.
언니들을 인터뷰하다가 엄마와 아빠에 대한 일화를 듣고 눈물이 났다. 아빠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갖고 있어서 부러웠다.
말한 그대로를 타이핑하느라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언니랑 이야기했던 시간 그대로가 드러나는 게 재미있어서 고치지 않았다.
작은언니와의 인터뷰가 많이 웃겼는데
무서워하는 게 뭐야?
"돈이 제일 무섭긴 한데 사소한 걸로는 송충이가 무섭지"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있다면?
"2020년 1월 삼성전자를 92000원에 산 것! 그거 물타기 하느라고 너무 힘들었는데 이번에 8 만전자에 팔아서 성질난다"
10년 단위 굵직한 사건. 0~10세까지의 기억 중에서 푸세식 화장실에 다리 빠졌던걸 재연해 주며 했던 이야기는 녹음해 놨는데 들을 때마다 웃겨서 아이들이 자꾸 작은 이모 이야기 틀어달라고 할 정도다. ㅋㅋㅋㅋ 10년 단위의 굵직한 사건들! 내년에는 좀 더 디테일하게 물어봐야지!!
내가 녹음까지 하며 인터뷰하는 것을 본 아이들이 본인들도 하고 싶다 해서 아이들 인터뷰도 했다. 아이들의 현재 생각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 내년에는 답변이 얼마나 달라질까?
이번 인터뷰에서 자극받은 엄마는 내년부터 자서전을 써보겠다고 하셨다. 엄마가 쭉 쓸 테니 네가 정리해 주렴! 하셨는데 빨리 엄마의 옛이야기도 보고 싶고 잘 엮어서 멋진 책으로 만들어드리고 싶다. 내년에는 엄마의 자서전과 우리 가족의 인터뷰집 두 권의 책을 소장하게되는 행복한 상상을 하며 인터뷰 내용들을 타이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