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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incent Dec 09. 202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박서보. 19년 6월.

MMCA 서울관. 박서보 -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bincent_kim/ 2019. 7. 20. 16:12 작성

                                                        

아스거 욘에 이어 다시 찾은 국현. 지난 윤형근 전시 때 정말 좋은 느낌을 받아서 단색 화가의 개인전이라는 이유만으로 오픈 전부터 많은 기대를 했다. 윤형근 작품을 검정색 기둥으로만 알았었고, 유영국 작품을 산으로만 알았듯이 박서보 화백의 작품 또한 '묘법'이라고 명명된 반복된 곡선 스케치에만 익숙했다.


당연히 이번 전시를 통해서도 간결한 선 너머에 숨겨진 작가의 신념과 철학을 느낄 수 있었고 시그니처 작품 외에 다양한 그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신념과 철학'이라 함은 "회화는 자기수련의 산물"이며 그를 통해 '현대인의 번민과 고통을 치유하는 예술'을 하고자 한다는 것, '다양한 그림들'이라 함은 '묘법' 외에 원형질(原形質), 유전질(遺傳質), '초기/중기/후기 묘법'과 같이 기존에 내게 익숙하지 않았던 작품들이다.



흥미로웠던 것은 전시가 역(逆) 시대 순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1층 1전시실의 후기 묘법으로 시작해서 지하 1층 2전시실의 초기작, 그리고 아카이브와 관객이 직접 그려보는 프로그램으로 전시가 마무리된다. 아스거 욘의 전시처럼 기존의 틀을 따르지 않아서 신선했지만 조금은 낯선 느낌도 있었다. 이러한 구성의 가장 큰 이유는 후기 묘법인 색채 묘법 감상에서 빛의 역할이 큰데 1전시실의 자연 채광이 가장 좋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술관에 갔던 날이 맑아서 그 목적을 충분히 누릴 수 있었다.



나는 전시 순서와 반대로 조금 더 편하게 읽을 수 있도록 시대순으로 리뷰를 하려고 한다.


회화 No.1-57, Oil on Canvas, 95 x 82cm, 1957


박서보의 화업은 한국 최초 앵포르멜 작가로 평가받게 한 <회화 No.1 - 57>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앵포르멜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195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추상 운동으로 차가운 기하학적 추상에 대응하여 감정을 자유롭게,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추상 미술의 한 장르이다. 말 그대로 informal, 비정형,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음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포트리에, 뒤뷔페, 한국에서는 박서보 외 윤명로, 김환기, 양수아, 강용운, 김서봉, 나병재 작가를 들 수 있다.


(좌) Jean Fautrier, Head of a Hostag #1, Oil and Pigments on Paper Mounted on Canvas, 63.5 x 53.3cm, 1944

(우) Jean Dubuffet, Dhôtel, Oil and Sand on Canvas, 118.1 x 89.2cm, 1947


(좌) 윤명로, 문신 64-1, Oil and Plaster on Linene, 116.5 x 91cm, 1964

(우) 양수아, 작품, Water Color and Oil on Paper, 58 x 57cm, 1970



박서보 작가는 1956년 한국현대미술의 시작점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김충선, 문우식, 김영환 작가와 함께 '반국전' 선언을 한다. 국전은 1949년부터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줄임말인데 3.1 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주관 하에 공모전 형식으로 이어진 조선미술전람회가 그 전신이다.


정부 주관 하에 이루어진 공모전이라 그런지 신진작가를 발굴한다는 설립 취지가 조금씩 퇴색되며 기성작가 위주, 혈연, 학연, 지연 중심 등의 문제점이 대두되었다. 이후 1981년 당시 문화부에서 신진작가 중심의 대한민국미술대전을 창설하며 폐지된다.



원형질(原形質) No.1-62, Oil on Canvas, 161 x 131cm, 1962


즉, 반국전 선언이라함은 기존의 딱딱하고 정해진 기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경향에 반기를 들고 틀을 깨는 새로운 작업을 통한 도전인 것이다. 따라서 선언 이후 앵포르멜이라는 장르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961년 파리에 체류하며 '분노와 절규를 표현한 서구 작가들에게 감명'을 받은 작가는 '원형질' 연작을 제작한다.


『한국과 서구의 전후 추상미술: 격정과 표현』의 좌담회에 따르면 작가는 이 시기의 작품을 "대량학살, 집단 폭력으로부터의 희생, 정신적 핍박, 부조리, 불안과 고독 그리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함 속에서 자폭하듯 그렇게 결행한 산물”이라고 표현한다.


원형질(原形質) No. 18-64, Oil on Canvas, 1964 / 원형질(原形質) No.21-65, Oil on Canvas, 1965


확실히 이 시기의 작품들을 보면 다양한 재료와 신선한 작업 방식이 주는 새로움은 있지만 우울하고 칙칙한 느낌이 든다. 그림이 풍기는 짙고 무거운 분위기는 쉽게 즐길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보다는 당대의 시대상을 모두 알고 있어야하고 그 지식에 더해 그 시대의 고난과 역경에 대한 공감마저 더해져야 오롯이 감상할 수 있겠다는 부담이 생긴다.



1960년대 후반의 유전질 시기는 원형질 시기와는 아주 대비가 큰 양상을 보인다. 팝아트 및 옵아트(Optical Art)의 영향을 받으며 전통적 오방색을 적용하여 동양적인 현대미를 보여준다. 하지만 오방색의 차분함 때문인지, 원형질 시기가 얼마 지나지 않은 탓인지, 얼굴이 없는 인물때문인지, 어딘가 기괴하거나 칙칙한 긴장감을 일으킨다. 서구의 문명을 한국적으로 해석하는 시도가 눈여겨볼 만했다.


유전질(遺傳質) No.2-68, Oil on Canvas, 1968 / 유전질(遺傳質) No.4-68, Oil on Canvas, 128 x 128cm, 1968
유전질(遺傳質) No.9-19-70, Oil on Canvas, 128 cx 128cm, 1970


유전질 작품이 있는 전시실 내에는 별도의 방이 있고 그 안에 "허의 공간"이라는 조형 작품이 있다. 사람은 없고 옷만 뛰어가는 형상으로 제작된 작품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아래 급격한 외형적 성장에서 오는 공허함인지 당시 노동자들의 처우에 대한 경각심인지, 작품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1970년 오사카 엑스포의 한국관에 출품했다가 '반정부 성향'이라는 정부 세력의 주장으로 철거된다.


허의 공간, FRP, 우레탄도장, LED조명, 가변 크기, 인체크기(1개), 2019 재제작


이 시기에 유전질 작품과는 별개로 박서보 작가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초기 묘법이 탄생한다. 사실 내가 특정 작품을 시그니처라고 하기엔 외람된 표현일 수는 있으나 나에겐 '박서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리즈이고 익숙하고 친근한 그림이다. 내가 이 연작을 좋아하는 이유는 편안한 색의 바탕에 유려한 곡선이 리드미컬하게 반복되는 모습이 마음에 안정을 주기 때문이다.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전시 제목처럼 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 흔적에 이입이 되는 것도 좋다.




묘법(描法) No.1-67, Pencil and Oil on Canvas, 1967


아들이 국어 공책에 낙서를 하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것은 이번 전시를 통해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이다. 전시 설명에 따르면 '쏟아지는 감정으로 그려낸 원형질 연작과 같이 새로운 무엇을 그려내야 한다는 의지가 아니라 체념과 포기에서 시작되는 비워내는 그림'이라고 한다. 화풍의 변화를 참 간결하게 설명했다.


묘법(描法) No.6-67, Pencil on Oil on Canvas, 1967 / 묘법(描法) No.13-70, 1970
묘법(描法) No.43-78-79-81, Pencil and Oil on Canvas, 1981


작품 일부
옆 전시실 엿보기


보통 후기 묘법의 일부로 설명되는 1980년대의 작품을 이번 전시에서는 중기 묘법으로 정의한다. 이 시기의 작품은 연필 드로잉에서 발전하여 닥종이에 연필 뿐 아니라 물감을 사용하고 물을 먹은 한지를 발라 질감을 살린다. 그래서 조금 더 깊이가 느껴지고 중후한 느낌이 든다.


한지가 마르기 전에 마무리 해야하는 표현의 특성상 한번 시작하면 도중에 멈추기가 어려워 24시간을 연속으로 작업을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두운 색감의 작품들도 있지만 앵포르멜 시기처럼 격한 감정이 느껴진다기 보다는 수양을 통해 잠잠해진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듯 하다.


묘법(描法) No.871228,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987 / 묘법(描法) No.930528, 1993

묘법(描法) No.900724 / 묘법(描法) No.900719 / 묘법(描法) No.900726,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1990 


묘법(描法) No.900719 세부, 출처:『박서보 -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작품 도판


마지막으로, 사실 이번 전시의 첫번째 순서인 후기 묘법은 손으로 작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막대기와 같은 도구를 이용하여 좁은 골을 만들어 낸다. 이 시기의 작품들을 색채 묘법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전보다 환하고 명랑한 기운이 돈다.

묘법(描法) No.070628,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2007


묘법(描法) No.161207,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2016
묘법(描法) No.180503,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2018

묘법(描法) No.090206,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2009 / 묘법(描法) No.080618, 2018 / 묘법(描法) No.071021, 2007


바로 위 작품의 색을 작가는 '공기색'이라고 정의했다. 마치 공기처럼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휴식, 치유의 색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비워내고 또 비워내는 과정'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비워진 공간으로 들어가보라는 오디오 가이드의 해설이 참 와닿았다.



다 보고 나오면 여러 가지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포스트잇에 나름의 표현을 해볼 수 있는 도구들, 작가의 여러 가지 영상들, 특히, 질감을 살려 제작해서 직접 만져볼 수 있도록 한 더미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작업을 하는 친구 중에 전시를 가면 꼭 작품을 만져본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예술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시 공간의 냄새를 맡고 관객의 발소리나 배경 음악을 들으며 여러 가지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합법적(?)으로 작품을 만져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작가 선정, 작품 구성, 전시 주제 등 여러 요소에서 갈수록 국현의 전시 퀄리티가 올라가는 것을 방문할 때마다 느낀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 가는 것도 쉽지 않지만 가는 전시마다 큰 만족을 얻는다. 역시 한국의 대표 미술관이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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