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하르트 리히터. 4900 Farben (Version XI).
3년 전 파리 루비이통 재단을 다녀온 이후 2019년 서울에도 오픈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반가웠다. 개관전을 자코메티 작품으로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같은 해 한가람 미술관, 그리고 파리 마욜 미술관에서 방대하고 자세한 전시를 보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
2020년 『커밍 오브 에이지』라는 소규모 사진전 이후 다시 찾게 된 루이 비통 메종 서울. 그때 왔을 때는 차를 가지고 와서 사진으로만 접했던 외관을 잘 못 봤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주차가 안된다고 해서 이번에는 가까운 네이처포엠 건물에 주차를 했다. 다사롭고 포근한 봄햇살을 맞으며 한적한 거리를 걸어가다 보니 마치 파리 본관의 미니어처 같은 느낌의 아름다운 건물이 보였다.
지난번 MCM 하우스도 그렇고 플래그십 스토어다 보니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와 아름다운 장식물, 직원들의 친절함까지, 전시장에 발을 딛기 전부터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독일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가로 추상화가다, 구상화가다, 팝아티스트다, 사진예술가다, 어느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여러 사조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장르의 작업을 해왔다. 아마 우리에게 (또는 나에게) 익숙한 작품은 몇 가지 색들이 강렬하게 뭉개진 추상화가 아닐까 한다.
이번 전시는 그의 여러 가지 작품 세계 중 색상표 시리즈의 가장 최근작을 다루고 있다. 리히터는 공업용 색상 차트 견본에 흥미를 느껴 이 작업을 1966년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색의 조화나 미학적인 관점에서의 접근이 아니라 정해진 기본 색상을 임의의 조합과 임의의 배열을 통해 작품을 구성한다.
2007년에는 독일 쾰른 대성당의 창문 디자인을 의뢰받는데 여기서 『돔 펜스터』라는 72가지 색으로 표현된 11,500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하게 되고 이는 같은 해 『4900 Colours』라는 색상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4900 Colours』는 11가지 버전으로 구성된 시리즈 작품인데 이번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 소개되는 것은 네 개의 판으로 이루어진 9번째 버전이다.
최근 내가 좋아하는 단색화를 좀 접하다가 정반대에 있는 작품을 보니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고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단색화가 잔잔한 호수 옆의 벤치에서 평화롭게 살랑바람을 맞는 기분이라면 이 작품은 한 손에는 핸드폰, 다른 한 손에는 넘쳐흐를 것 같은 음료를 든 채 끊임없이 반짝이는 조명과 내 키만 한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에 묻혀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비교 대상이 대상인지라 그런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 색들, 저 조합들로 만들어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 금방이라도 살아서 서로 자리를 바꿔 다른 구성을 보여줄 것만 같은 역동성, 다양한 색상들이 보여주는 활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가만히 작품을 보다가 문득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민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히터는 심지어 색의 조합 및 순서조차 정하지 않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임의로 배치했다. 그 시스템 자체를 개발했다고는 하나 이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 이 작품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작가가 오래전부터 색에 대한 고찰을 해온 결과가 녹아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또한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겉으로 보기에 단순해 보이는 작품도 기저에 놓인 의미, 미술사적 흐름에서 차지하는 비중 등이 매우 중요하기에 그 표현방식을 잣대로 삼아 쉽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고 우리가 하찮게 생각할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이것이 예술인가라는 회의가 들었고 많이 양보해서 예술로 인정은 받을 수 있더라도 리히터의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추앙까지 받을만한 작품인가라는 생각을 했다. 작가의 사진예술에 대한 설명 중 "예술에 있어서 진정성의 문제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한다" (국립현대미술관,「게르하르트 리히터」(컬처 북스, 2006), 표지 뒷페이지.)는 대목이 있는데 오히려 내가 그 의도대로 이해한 것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작품에 대한 대중들의 진부한 감상평, "이건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작업에 착수한 순간, 저 색상, 저 조합은 아무렇게나 해서 되는 게 아니구나라는 걸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걸 보고 따라 하는 것이야 10살짜리 초등학생도 할 수 있겠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이는 저 조합을 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입체감이나 아름다움은 쉽게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겸손함을 되찾게 되었다.
전시장을 잠깐 벗어나 옆에 있는 공간으로 가면 루이 비통 재단의 이모저모를 볼 수 있다. 설계 모형, 그간 있었던 전시들의 도록, 건축가와 재단장의 인터뷰 영상 등 넓진 않지만 볼거리가 꽤 있다. 예전 바스키아와 실레의 도록도 반가웠다.
다 좋은데 전시 공간이 다소 좁은 것이 아쉽다. 하지만 그만큼 더 좋은 작품들을 통해 양보다 질로 승부하는 곳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모든 작품 사진 © 2021 Gerhard Richter - All Rights Reserved
#게르하르트리히터 #4900 #루이비통재단 #에스파스루이비통서울 #루이비통메종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