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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덕희 Jul 23. 2020

시를 잊은 그대에게 / 정재찬

저 멀리 강진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친구에게 책 선물을 받았다. 그가 ‘키팅’같은 선생이 되길 약간은 바란다. 어찌됐건 먼 시골에서 고생하는 친구를 조금은 존경한다. 고맙고 귀찮은 마음으로 읽고 쓴다.


나는 운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학창시절 교과서의 지문을 배울 때도 시조나 가요같은 것들엔 젬병이였고 관심조차 없었다. 소설을 읽을 때의 감동이나 긴장감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재미조차도 없는 것을 왜 읽는지 당최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언 스물 다섯이 된 지금까지도 시를 잊고 살았다. <시를 잊은 그대에게> 라는 제목은 정확하게 나를 겨냥한다.


시는 짧은 순간의 감상이 극에 달한 그 순간에 순식간에 탄생하는 줄로만 알았었다. 재고도, 퇴고도 없는 순수한 영감(靈感)과 재능의 세계. 그래서 시를 쓰는 사람도, 시를 읽는 사람도 천재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비상한 사람들이겠거니 했다. 그럼에도 글과 책을 좋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종국에는 시를 접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글을 읽는 사람들은 모두 비상해지는 것인가? 비상한 사람들만이 글을 읽는 것인가?


사실 시라는 것이 천재가 술 마시고 슥삭 갈겨놓은 것이 불후의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정교한 기술로 갈고 벼린 짧은 문장으로 후려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다. 그렇다고 시가 정답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 정교함으로 둘러싸인 표상을 뚫고 안을 들여다보는 혜안과 감수성이 필요한데, 슬프게도 내 문학적 감수성은 뭔가를 꿰뚫기엔 뭉퉁하고 투박하기만 하다.


저자는 중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진행되는 시와 문학에 관한 국어수업이 마치 종교적 제사처럼 경건함과 엄숙함 속에서 이뤄지는 것을 안타까운 어조로 말한다. 시인을 신의 위치로 올려 경전을 외우듯 천편일률적으로 정통적 해석을 달달 외우는 세태가 시를 즐기는 것을 방해한다고. 저자 본인 역시 국어 교과서를 집필하고, 미래의 국어교사를 가르치고, 과제를 내고, 시험을 출제하는 과정에서 그런 분위기를 배제할 수는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최소한 교실 문 밖에서라도 시 읽는 것의, 노래하는 즐거움을 알리기 위해 그는 여러가지 시, 영화, 소설들과 그 작가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그것들을 바라볼 것을 권면한다. 문학적으로 작품들을 이해하기 이전에 그 작가 개인적인 사정 면면을 훝어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우리가 흔히 애국심과 투쟁심을 은유로 삼은 시로 알고 있는 것이 사실은 연애시에 가깝다던가 하는 사실이 피식 웃음짓게 만든다.


얼마전에 읽었던 소설가 김훈의 수필 <자전거여행>중의 일부가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던가 복효근의 <목련 후기>, 김춘수와 맞닿아 있는 것을 읽었을 때는 어쩌면 짜릿하기까지 했다. 활자 뿐만이 아니다. 내가 너무 재밌게 보았던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가 황동규 시인의 <즐거운 편지>라는 반석 위에 지어진 영화고, 영화의 원래 제목이 ‘편지’로 지어질 뻔 한 사실도 재밌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이 알게모르게 시(詩)와 닿아있었다.


그는 몇 연이 어쩌고 몇 행이 어쩌고 구조가 어쩌고 구구절절 분석하기 이전에 시를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다른 길을 알려준다. 물론 이것이 미학적, 학술적 가치를 좇는 과정이 즐겁지 않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시를 즐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소개해 준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는 훌륭한 노래 가사나, 완벽한 순간의 영화 대사 같은 것을 발견했을 때 ‘한 편의 시’ 같다고 표현한다. 이제는 너무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으로 느껴지는 이 표현이 역설적으로 본디 ‘시’라는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지를 보여준다. 가진 것 안에서 풍부하고 기꺼운 마음으로 삶을 음미하는 것. 내가 책을 좋아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이자 시가 멋진 이유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 재치있게 써야 하는 교양과목의 레포트에, 감사한 마음을 표현 해야할 누군가에게, 혹은 나 자신에게 읊어주고 싶은 시 한 편쯤 마음에 품고 살아보자. 직장인들이여! 마음속의 사표 한 장 옆에 시 한 편을 함께 품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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