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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에 춤추는에세이스트
Mar 14. 2024
이번 생에 맡은 역할은 나야
스페인 워킹홀리데이 78일째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기록에 소홀했다.
기록하지 않는 건 사라진다고 하는데
사라지진 않지만
나만 알 뿐
아무도 모르기야 하겠지.
그래서 다시 정신을 붙들고 노트북을 열었다.
기록하지 않은 지난 시간 어떻게 지냈나?
가만 보자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 많은 일이 일어날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많은 일들,
하고 보니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단 걸 깨달은 일들,
이 곳 현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스페인어,영어로 설명하는 춤수업을 시작했다.
3명의 학생이 들으러왔고 정규적으로 수업을 하게 됐다.
하기 전까지 많은 부담을 느꼈는데
막상 하고보니 얼마든지 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단 걸 깨달았다.
유럽에서 하는 가장 큰 4차산업 행사인
Mobile World Congress 2024 바르셀로나 단기알바에 고용됐다.
삼성 반도체 VIP존에서 일하게 됐는데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 3개국어로 소통하고
관리감독해야하는 호스트 담당 팀리더직을 맡게 됐다.
VIP 담당 부스였던 만큼 고위직 인사분들이
많이 오고, 중요한 미팅들이 비밀리에 진행되던
부스였던 만큼 한국어를 할 수 있는 호스트를 필요로 했는데
신청한 사람중에 유일한 한국인이자 3개국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어서
시급 16유로라는 큰 돈을 받으며
호스트들과 경비원들을 모두 관리감독하는 팀리더 직을 맡게됐다.
와.. 태어나서 일해본 중에
가장 심한 감정노동에 시달렸지만
중간 소통담당자로서 삼성이란 고객사의 컴플레인을
다이렉트로 받으랴,
그걸 사회경험 하나 없는 20대 초반의
철부지 풋내기 스페인 애들을
우쭈쭈해주랴 좋은 말로 혼내랴
참 정신없이 힘들고 잠 못자는 나날을 보냈지만
그만큼 정말 좋은 리더란 무엇인가?
어떻게 말을 따르고,
어떻게 이끌어야하는지
많이 배우게 된 시간이었다.
이틀 설렁설렁 일하고, 3일 빡세게 일해서
100만원 넘게 벌었으니 고작 5일 일한 것 치고
스페인의 풀타임 단순노동 월급의 절반이상을 벌었다.
스페인에 떠나오기 전엔 스페인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온 한국인들의 유튜브 영상, 블로그 글을 읽어봤을때
그나마 스페인어 잘하는 분들은 일반 회사 사무직으로 일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10에 아홉은
한식당에서 알바하거나,
투어가이드로 일하는게 대부분이다.
근데 난 실컷 카탈루냐 지방 돌아다니며
틴더로 남자들도 만나며
아름다운 바닷가와 역사명소들을 돌아다니며 잘 놀다가
바르셀로나 도착해서 원했던 대로
춤수업 실컷 들으러 다니면서 인맥쌓다가,
자연스럽게 나한테 수업 열어달라는 학생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스페인어로 춤수업을 열어서 가르쳐보는 경험도 해보고,
3개국어 통역하는 팀리더 역할로
삼성에 고용되서 잠시 일해보고,
나의 능력과 매력을 알아봐주는 친구를 만나
내 수업설명 포토샵으로 다 만들어주고,
지금은 내 화보촬영, 댄스비디오 촬영 도와주겠다며
같이 계획짜자고 먼저 제안해오는 친구도 생겼다.
매일 어딜 나가든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대중교통만 타도
너무 잘생겨서 눈을 떼고 싶지 않은 남성이
새롭게 한명씩은 꼭 나타나고,
(한국에 살땐 1년에 1번 볼까말까 했다면..)
아무 생각없이 어떤 수업을 가든, 파티를 가든
나에게 친구 이상의 목적이 다분히 느껴지는
이성이 무조건 한 명씩은 꼭 나타난다.
스페인 와서 처음으로 내 성정체성이 무조건 이성애자가
아닐 수 있겠단 걸 깨달았고,
한국에서도 늘 마음이야 열려있었지만
아무런 기회도 없었던 반면
동성간의 결혼이 완전히 합법화된 이 나라에선
퀴어문화가 너무나도 열려있어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범성애, 트렌스젠더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당연시 되는 문화속에 있다보니
매력있는 여성을 보며 설레는 감정도 느끼고
우연히 파티에서 내게 키스하려고 다가오는
여성을 피하지 않고 처음으로 키스해보는 경험도 했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남성과 키스하는 것과 다를바없이 설레고 짜릿한 감정을 느꼈다.
이들은 얘기한다.
나는 남자를 사랑해, 여자를 사랑해 라고 얘기하지 않아.
그냥 사람을 사랑해.
나는 그냥 사람을 사랑해.
그 사람이 매력있고 멋지면 그냥 사랑해.
퀴어파티에서 몇몇 여성들은 남성들이 더우면 윗통을 벗어제끼고 춤을 추듯
브래지어 하나없이 훌훌 벗어던지고
음악속에 몸을 맡겼다.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래, 여자는 윗옷을 벗으면 안된다는 건 어디 적혀있는데?
그냥 부끄러워서 사회가 그래왔으니까
젖가슴을 숨기고 살았지만
그럴 필요가 뭐가있어?
난 지금 퀴어파티에 왔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고,
여기선 아무도 나를 이렇네 저렇게 판단하지 않을거야.
여기서 벗어보지 어디서 벗어봐?
안그래도 춤추느라 땀나고 더워죽겠는데 벗어볼까?
10분 정도 고민한다가
겉옷이며 내복이며 속옷까지 다 훌훌 벗어던지고
방방 뛰고 춤을 췄다.
몇몇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
와! 그거야! 정말 멋져!
뿐만이 아니라,
고마워! 정말 고마워!
라는 말을 전해왔다.
이 문화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여줘서 고마워.
이 문화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줘서 고마워.
그렇게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 그 순간조차 나는
일반사회가 규정한 시선에서 보기에
너무 작고, 못생긴 형태가 아닐까
신경이 쓰여
자꾸 내 가슴을 내려다봤다.
근데 뭐..
대낮에 길거리에서 젖가슴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한밤중에 네온사인이 낭낭히 비추는
어두운 클럽안에서 춤을 추는데
그 정도 용기는 낼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난 용감할 수 있다.
나는 그냥 나일 수 있다.
나랑 자고 싶어서 안달복달이 나서
주접떠는 남자와 내가 원하면 하룻밤 잘 수도 있고,
싫으면 싫다고 꺼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나에게 같이 자자고 주접떠는 70세 할아버지에게
단호하게 싫다고 말하고
자기의 행동을 이런저런 핑계로 합리화하는 말을
딱 자를 수도 있게 됐다.
잘못을 뉘우칠망정
상대방이 성희롱이라 느낄 수 있는 상황을
분간 못 하고 자기합리화 해대는 인간이랑
말 섞고 싶지 않다고
니 딸과 손녀딸에게도 그렇게 말할래? 라고
강하게 화낼수도 있게 됐다.
강하게 화를 내고 나서 이런
성희롱과 순수한 관심을 분간 못 하고
자기 말과 행동을 오히려 여성에게 이해시키려 애쓰는
황당하기 짝이없는 인간들,
합리화하기 바쁜 인간들은
전세계 어딜가나 있을텐데
이들에게 마냥 욕을 날리고 관계를 단절해버리는게 답일까?
오히려 더 감정적일 수 있는 상황에서
차갑고 이성적으로 말하면 그들이 조금이라도
미래에 자신의 말과 행동을 한번즘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더 내 말을 이해하게 만드는 소통법은 없을까?
분노에 찬 문자를 보내놓고
내 말과 행동을 돌아보며 좋은 소통이란 무얼까?
특히나 이 성이슈에 대해서
어떻게하면 건강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예전 같았으면 내 수치심에 잠겨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고 오랫동안 괴로워했을 일을
화와 짜증이야 나지만 잠식되지 않고
주도적으로 어떻게 이 상황을 가장 건강하게
풀어나갈 것인가? 까지 고민하게 됐다.
지금까지의 생각은
이걸 성이슈라고 따로 특별히 여길 것도 없고,
남성과 여성의 대화라고 여길 것도 없고,
그동안 내가 겪어온 모든 피해의식으로 상대방을
대할 필요도 없고,
그냥 하나의 갈등상황
문제해결이 필요한 대화,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난 지금 겪은 일로 대하고
바라본다면 훨씬 더 명확하고 깔끔한
대화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내 할말을 하되,
상대방이 이해하든 말든 그건 상대의 몫이고
이해하면 좋고
아니면 그저 그렇게 스쳐갈 인연일 뿐인 것이다.
그 외에 어떤 소모적 노력과
지나친 감정고문을 스스로에게 가할 필요가 없다.
나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긍정적 영향력을 전하고 싶지만
듣는 귀가 없는 이들 한명한명을 붙잡고
나를 희생하는 일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나는 내 부족한 점,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점을
늘 기억하며
내가 옳다는 냥, 내가 맞다는 냥
그 생각에 빠지게 될 때 알아차리고
어디까지나 진리가 아닌, "생각"일 뿐이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나에 대해 진심으로 전해오는 상대방의 말이 있다면 귀담아듣고,
내가 겪게 되는 상황들에서 잘 배워나가고,
그렇게 나다움을 찾아가다보면
나를 알아봐주고 좋아해줄 사람들을 내 영향을 받을 것이고,
나에게 관심없는 사람들을 자기들 갈길 갈 것이다.
내 현실만 놓고 봐도 그렇다.
내가 아무런 관심도 없는 남자들은 나 좋다고 그렇게
티를 내는데
내가 매력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먼저 말도 걸고
다가가보려 해도 내게 무관심하다.
겨우 3개월일 뿐이었지만
어쨌든 날 좋아할 사람은 좋아하고
아닐 사람은 아니다.
나또한 그렇다. 그들이 갖은 노력과 구애를 한다해도
난 딱히 그들을 남성으로서 진짜 매력있다
좋다고 느끼긴 어려울 것 같다.
될 일은 되고 안 일어날 일은 안 일어난다.
그저 순간순간에 잘 깨어있고
지금 처한 상황
지금 이 곳 바르셀로나에서의 삶을 나는 충실히 잘 살았는가?
이 곳의 문화, 사람, 역사와 함께 했는가?
그리고 앞으로 가고 싶은 다른 곳을 결정할때
조급하게 마음만 앞서진 않는가?
이 곳에서의 나의 역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역할로
잘 나타났는가?
더이상 나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이들이 없는가?
그렇다면 다른 곳에서 더 나의 역할과 필요한 곳이
있는지 옮겨서 찾아보는 것이 좋은 선택일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통해 살아간다면,
허무함에 욜로가 되거나
인생역전 파이어족으로 불태우며 살 필요도 없다.
당신을 그 무엇으로 정의할 필요도 없다.
그냥 나이면 된다.
이번생에 내가 맡은 역할은 내가 되기.
그거 하나밖에 없다.
그걸 위해 책을 읽고,
몸을 돌보고 운동을 하고,
정신건강을 챙기고,
겸손하고, 성찰해야한다.
아주 많이 힘들겠지만
무지와 괴로움속에 빠져사는 힘듦과
무지를 깨나가며 괴로운 힘듦은 다른 것이다.
어디를 향해 나아갈것인가?
나는 나답게 살것이다.
나를 좋은 환경에 데려다 놓겠다는 나의 결심을
정말 맞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더 나다울 수 있는 환경에 데려다놨다.
한국에서 중요치 않은 것들에 너무 많은
신경과 눈치를 보느라 괴롭게 살았던 것들에
에너지를 쓸 일이 없으니
훨씬 더 나를 돌보고 사람들과 허울없이
지내는 것에 많은 시간을 쓰게 된다.
돈도 그 무엇도 관심을 기울여 해결하려하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해결되는 것들이다.
어떻게 돈 벌지?
어떻게 먹고 살지? 가 아니라,
어딜가서 어떤 사람들과 있어야
내가 제일 잘 쓰이지?
제일 편안하면서 자신감이 넘치지?
그런 질문을 하면
나다움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더 나에 대해 많이 깨닫고 표현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내 안의 야생성을 깨워가는 중이다.
매일매일 밝게 웃으며
나를 이루는 이들을 사랑하고 돌보며
돌봄 받는 것에 깊이 감사하고 또 밝게 웃으며.
그렇게 매일 참 많이 웃고
많이 감사하다고 늘 표현하는 하루하루를
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