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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 너머의 미술 애호가: 17세기 네덜란드의 보여주기

by 발걸음

주식, 미술, 자산—이 세 단어가 나란히 놓이면 흔히 떠올리는 도시는 뉴욕이거나 런던일 것이다. 특히 2004년 헤지펀드 부자 스티브 코언이 데미안 허스트의 대표작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을 약 800만 달러에 구입했다는 뉴스는 미술 소비가 자본의 상징처럼 기능하는 오늘날의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주식 시장의 호황과 미술품 수집 열기가 맞물려 돌아가는 이 익숙한 풍경은 현대의 금융 중심지에서만 벌어진 일은 아니었다.



데미안 허스트, <살라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1991


이 작품은 원래 1991년에 영국의 광고 재벌인 찰스 사치(Charles Saatchi)가 허스트에게 주문한 작품으로 14피트 길이의 호랑이상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에 담아 유리 케이스에 전시한 것이다. 코언은 이 작품을 매입한 뒤 상어가 부패하자 허스트에게 10만 달러 이상을 지불하고 복원을 의뢰했다고 한다.


Jeff Koons, Rabbit, 1986


코언의 컬렉션은 허스트의 작품 외에도 마크 퀸(Marc Quinn)이 자신의 피를 냉동해 만든 자화상 조각, <셀프 Self>에서부터 2019년 생존 작가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제프 쿤스(Jeff Koons)의 <토끼>에 이르기까지 매우 화려하다.


오늘날의 주식 부자들, 특히 최근에는 코인 부자들이 미술품 구내로 이름을 날리듯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때 사람들도 그들의 손에 쥐어진 부를 미술품에 쏟았다.


1640년 영국인인 피터 먼디는 네덜란드에 들렀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사람들은 값비싼 그림들로 자기 집, 특히 길가로 난 방을 장식하려 애쓴다. 정육점이나 빵집도 가게 안에 그림을 걸어두고 대장장이나 구두장이도 작업장에 최소한 그림 한 점쯤은 둔다." 또 그는 "예술과 그림에 대한 애정에 있어서만큼은 네덜란드를 능가할 나라가 없다"라고 덧붙였다.


암스테르담이나 하를럼 같은 해상 무역의 중심지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들어온 향신료, 설탕, 도자기, 직물이 넘쳐났고, 동인도회사의 주식은 첫 항해에서 이미 400%의 수익을 기록했다. 이 엄청난 부는 상인과 중산층 시민의 손에 집중되었고, 그들에게는 이제 취향을 쌓을 돈이 충분했다. 미술은 귀족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나 취향과 예산에 따라 그림 가게에서 구입할 수 있는 소비재가 되었고 미술 시장은 전례 없이 호황을 이루었다.


Quirijn van Brekelenkam, The Tailor's Workshop, 1661


이처럼 미술이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는 사실은 키레인 판 브렉켈런캄의 〈재봉사의 작업장〉 (1661)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 여인이 옷을 의뢰하러 들른 소박한 작업실, 여기에도 제법 큼직한 풍경화가 벽에 걸려 있다. 화가가 옷값 대신 건넨 것일 수도, 장인이 직접 구매한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그림이 귀족이나 성직자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림은 재봉사의 작업실에도, 정육점과 빵집, 부엌과 푸줏간에도 있었다. 네덜란드는 말 그대로 ‘그림이 넘쳐나는 사회’였다.


외국인 여행자들은 이 풍경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 외국인은 네덜란드인들이 "미술 애호병에 걸린 민족 같다"고까지 평했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미술은 권위의 공간, 즉 교회나 귀족의 저택에만 있는 것이었지만 네덜란드에서는 일상의 공간이 전시 갤러리였다.


이러한 ‘전시의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창문이다. 네덜란드 도시의 집들은 거리와 면한 방에 큰 유리창을 냈고 대체로 커튼은 치지 않았다. 이는 채광을 위한 실용적 선택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으로 ‘보여주기’의 장치였다. 지나가는 이들이 그 집의 실내를 들여다볼 수 있도록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창은, 집주인의 안목과 교양, 윤리와 자긍심을 외부에 드러내는 액자였다. 특히 거리와 접한 방은 가장 정성스럽게 꾸며졌다. 매우 부유한 집은 수십 점에서 수백 점에 이르는 그림을 집안 곳곳에 걸었다. 기록에 의하면 방 하나에 삼사십 점이 걸려 있던 집도 있었다. 그리고 행인들은 투명한 창을 통해 그 집안의 부와 안목을 구경했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가정에서 창문은 집 주인이 쌓은 부를 과시하는 동시에 칼뱅주의 윤리 속에서 '우리는 하나도 숨길 게 없다'는 의미에서의 투명성을 표현하는 무대였다. 오늘날까지도 네덜란드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커다란 창을 통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름다운 실내에 놀라곤 한다. 암스테르담이나 하를럼의 주택가를 걷다 보면 커튼 없이 훤히 열린 창 너머로 아름다운 거실이 마치 백화점 쇼윈도처럼 시선을 의식하며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Johaness Vermeer, A Young Women standing at a Virginal,



이러한 '보여주기의 창'은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고 그것을 창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네덜란드 사람들의 주택 양식의 특징이었던 동시에 네덜란드 풍속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시각적 장치이기도 하다. 여러 풍속화에서 화가들은 왼쪽에 창이 있는 고요한 실내에서 빛을 받으며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또 다른 일에 몰두하는 여주인공들을 묘사했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은 그 대표적 예다. <버지널 앞에 선 젊은 여인>에서 여인은 고급스러운 실내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고, 왼쪽의 커다란 창으로 따뜻한 빛이 스며든다. 그녀 뒤로 황금색 액자 안에 자그마한 풍경화가 걸려 있고 그 옆으로 제법 큰 크기의 큐피드를 그린 그림이 있어서 이 장면이 사랑과 관련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화면 밖을 향하는 여주인공의 응시와 갈망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함께 '조화 harmony'를 이루며 악기 연주를 할 상대는 어디 있는 걸까? 화면 오른쪽 구석에 관람자를 등지고 놓인 빈 의자는 그림을 보는 우리 관람자를 배려한 자리이다. 그 공간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누군가, 바로 이 그림을 바라보는 관람자에게 사랑의 하모니를 함께 연주하자는 조용한 초대의 손짓이다.




Johaness Vermeer, Lady Writing a Letter, 1670-71


또 다른 작품인 <편지 쓰는 여인>에서는 주인공이 책상 앞에서 편지를 쓰고, 하녀가 뒤에서 창을 바라본다. 이번에도 화면 안의 벽에는 그림이 걸려 있는데, 그것은 파라오의 공주가 바구니에 실린 아기 모세를 건져내는 장면이다. 이는 여인이 쓰는 편지의 수신인이나 내용이 신분을 넘나드는 관계임을 암시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내로 들어온 빛, 하녀의 시선, 그리고 '구원의 은유'가 되는 성서 장면은 고요한 실내에 깔린 서사를 말해준다. 관객은 하녀의 눈길을 따라 창문 너머로 시선을 보낸다. 이는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가 장면 안에 들어온 또 하나의 시선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한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을 비롯한 네덜란드의 풍속화는 그렇게 창과 빛, 그리고 그림 속 그림이라는 장치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물질적 풍요, 문화적 세련됨, 그리고 도덕적 이상을 복합적으로 응축해 보여주는 시각적 언어로 작동했다. 풍경화든 정물화든, 혹은 고요한 실내의 한 장면이든, 그것은 단지 미적 즐거움을 위한 장면이 아니라, 삶의 윤리와 사회적 위치, 감정과 욕망을 섬세하게 조율하는 공간이자 장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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