틴토레토의 그림, <수산나와 장로들>을 보고
요즘 지혜학교 미술사 강의를 두 곳에서 하고 있어요. 미술사에 열정과 호기심을 가지고 가지고 참여하는 어른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소중하고 흥미로워지고 있어요. 강의 시간이 3시간이나 되기 때문에 새로운 걸 시도할 시간이 충분하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3시간 중 30분~40분 정도는 참여자들이 작품을 자세히 관찰하거나 개념을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도록 간단한 과제를 이것저것 제안해보고 있어요.
지난번 시간은 미술에서의 누드가 주제였어요. 작품 자세히 보기의 일환으로 누드 인물이 묘사된 르네상스 회화에서부터 동시대 퍼포먼스 작품까지 총 5점을 선정했어요. 참여자들은 5점의 작품 이미지 중에서 각자 원하는 걸 선택했어요. 참여자들에게 제시한 과제는 선택한 이미지 속의 인물 한 명을 골라 그의 관점에서 일기나 혹은 편지를 작성하는 것이었어요. 참여자들은 작품에 대해서도, 작품의 배경이나 서사에 대해서도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예요. 그래야 편견 없이 자세히 볼 수 있으니까요.
그림을 자세히 보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참여자들의 상상력 만점인 글을 읽을 때마다 많이 웃게 되어요.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랬는데 한 참여자가 틴토레토의 <수산나와 장로들>이라는 그림을 보고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썼어요.
참고로 '수산나와 장로들' 주제는 외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어요. 외경이라 함은 성경을 집대성할 때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리스어 번역성경인 70인역에는 들어가 있는 이야기예요. 이 장면은 '수산나와 장로들' 이야기 중에서 정결한 유대인 처녀인 수산나가 목욕을 하고 있는데 성욕에 사로잡힌 두 장로가 그녀를 겁탈하기 위해 훔쳐보는 장면을 다룬 것이에요.
지혜학교 참여자 민**의 글
황색 옷을 입고 나무 뒤에 몸을 숨긴 백발 남성의 관점에서 여인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름 모를 아름다운 여인,
나는 이 주변을 하릴없이 산책하며 사색을 즐기는 그저 나이 많은 늙은이랍니다.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쓰는 이유를 나도 잘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펜을 들고 편지를 씁니다. 이건 나의 복잡한 마음을 고백하는 고해성사와도 같아요. 그러나 당신에게 떳떳하게 나서서 고해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길 바랍니다. 이제 당신에게 나의 복잡한 마음을 고백할게요. 매우 떨립니다.
당신을 훔쳐본 지 한 달째입니다. 놀라셨을까요?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어요. 나에겐 여유 시간이 아주 많답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 푸른 나뭇잎, 바람을 느끼며 걷는 그때 붉은 옷을 입은 남성이 풀숲에 모로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였지요. 그는 나의 바스락대는 발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듯 어나 한 곳만을 바라보는 것에 열중했습니다. 그리고 그 광경은 시간이 많은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어요. 나는 다가갔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하면서요.
신기한 풀? 갓 태어난 고용이? 아뇨. 그 대상은 지금 이 편지를 읽고 있는 바로 당신이었어요. 순간 화가 온몸을 뒤덮었습니다. 그가 입고 있는 붉은색의 옷처럼 내 눈과 귀도 빠르게 달아올랐습니다. 나는 당장 그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어 더욱 가까이 다가갔어요. 아, 그리고 몸을 닦는 당신의 흰 손을 보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흰 손, 붉은 뺨,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 미안하지만 눈을 뗄 수 없었어요. 나는 당신의 나른한 손짓을 멍하니 감상할 뿐이었습니다. 더 이상 내 시야에는 당신을 훔쳐보던 그 남성은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당신을 몰래 바라보는 나 자신을 수치스러워 한 지 한 달째라는 말입니다.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싶습니다. 이제 당신은 더 이상 그곳에서 몸을 단장하지 않을 겁니다. 나 스스로 당신을 끊을 수 없어요. 당신이 나를 끊어줄 수 있도록 이 편지를 칼날 삼아 보냅니다.
후경에 작게 묘사된 노인의 관점에서 글을 썼다는 점이 특이했어요. 글쓴이는 노인의 관점에서 상황을 꾸미고 감정을 이입하면서 그림에 표현된 여러 세부사항을 글에 포함시켰어요. 그래서 내용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화면을 자세히 관찰하고 작성했음이 느껴져요. 이 편지처럼 전경에 있는 빨간 옷을 입은 노인은 분명히 나체의 여인과도, 관람자와도 가까이 있기에 더 위험해 보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설정이 아주 그럴싸해요. 물론 글쓴이가 나중에 외경 다니엘서를 읽는다면 얼마나 웃게 될지 상상이 되네요.
'수산나와 장로들'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도 다룬 주제인데요 원작을 볼 기회가 마침 최근에 있었어요. 지난 7월에 파리에 있는 무제 자크마르-앙드레에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작품을 한데 모은 귀한 전시를 한다고 해서 가봤어요. 젠틸레스키의 작품이 한두 점 정도 상설 전시에 있는 건 보았지만 이렇게 많은 작품이 한 곳에 모여있는 기회는 정말 드물잖아요.
이 아름다운 저택이 무제 자크마르-앙드레이고요, 과거에는 집이었지만 지금은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어요. 여기에 바로 아래의 그림, <수산나와 장로들>이 있었어요. 전반적으로 젠틸레스키의 작품 크기가 너무 초대형이어서 놀랐고요, 그만큼 화가의 명성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었어요.
저택의 내부를 갤러리로 하다 보니 공간은 조금 협소하고 또 이 특별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미술 애호가들이 다 모여서 이 작품은 가까이 서서 바라보기조차 불가능했어요. 인기가 아주 많았거든요. 위의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젠틸레스키가 그린 수산나는 온몸으로 완강히 거부의 표현을 하고 있어요. 노인들은 수산나와 너무나 가까이 있고 또 화면의 깊이감이 아주 얕아서 관람자와도 무척 밀접한 거리에 있어요. 그래서 위험성, 공격성, 불쾌감을 자아내지요. 그에 비해 틴토레토의 수산나는 바로 앞에서 누가 훔쳐보고 있는지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천연덕스럽게 거울을 응시하며 목욕과 화장을 즐기고 있어요.
같은 <수산나와 장로들>이어도 이야기는 이렇게 달라요.
고대 로마 이후 명맥이 끊겼다가 누드는 1400년 경부터 고전 미술의 부활과 함께 재발견되었어요. 점점 서유럽 미술에서 누드는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었어요. 예술가들은 누드를 점점 더 실감 나고 현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집중했어요. 이탈리아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미술의 모델을 연구하면서 원근법, 비례, 해부학을 발달시킬 수 있었어요. 한편 북유럽에서는 유화 기법을 정교하게 발전시켜 피부, 머리카락, 눈의 반짝임을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어요. 점차 인체를 잘 묘사하는 일은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어요.
누드를 잘 그리는 것이 화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지만 그런 동시에 서유럽의 기독교 전통의 맥락에서 보자면 누드 그림은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위험한 것이기도 했어요. 그렇기에 당시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수산나나 밧셰바 주제의 그림은 어쩐지 애매하기만 해요. 그림을 즐기란 말인가 아닌가? 나체를 즐기란 말인가 아닌가? 성경에 다른 이야기도 많은데 굳이 이렇게 야한 이야기를 선택한 이유가 뭘까? 이런 의문이 들지요.
이론상으로는 그래요. 이런 관능적인 누드 그림들은 관람자에게 선택권을 주는 것이었어요. 누드를 본다는 건 죄악스러운 성욕에 빠지는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림의 미적 품질과 예술가의 기술을 평가하는 높은 경지의 심미안을 계발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경지는 저절로 도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교육을 받아야 하고 특정 사회 계층에 속해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이었어요.
과거에 엘리트 계층의 사람들은 이렇게 근거를 마련해 놓고 아름다운 누드 그림을 맘껏 즐겼답니다. 아주 야한 그림이라면 커튼을 쳐놓고 비밀스럽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