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고 MBWA의 추억
고위 임원이 회사의 현장을 둘러본다고 하면 어떤 풍경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 임원은 진지한 표정으로 현장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직원들은 자료나 태블릿 PC를 들고 따라다니는 드라마 같은 장면을 상상할 수도 있겠다. 이동은 어떻게 할까? 회장과 임원은 기사가 운전하는 차량에 탑승해서 영화 <타짜>의 곽철용과 고니가 하는 대화라도 나누실까? 이랜드에서는 그 모든 상상을 깨는 전혀 다른 모습의 현장화가 있는데, 이름하여 ‘봉고 MBWA’다.
MBWA는 Management By Wandering Around의 약자로, 현장경영을 뜻한다. 경영자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벗어나 외부고객이나 직원을 현장에서 직접 확인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경영전략으로 알려져있다. 봉고는? 타악기의 일종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물론 승합차를 뜻하는 말이다. 봉고 MBWA는 쉽게 말해, 승합차를 타고 높은 분들이 주요 현장을 돌아보는 것이다.
회장님과 동행하는 봉고 MBWA는 이랜드에서 최상급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행사다. 이랜드는 비서실 조직이 따로 없다. 때문에 회장이 직접 현장에 갈 때 비서실이 수행하는 게 아니라, 해당 현장의 본부장급 인사와 임원, 그리고 전략기획실이 수행한다. 보통은 그룹 전략기획실이 현장화 날짜를 사업부에 주면, 그 사업부의 전략기획실에서 어떤 현장에서 어떤 사업현황을 보여드릴지 계획을 짠다.
본인이 현장화를 받는 대상이라고 생각해보자. 지점장이라면 본부장이 언제쯤 도착해서 무엇을 볼 것인지에 관심이 있을 것이다. 그 지점의 알바라면? 초조하게 스마트폰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바닥에 먼지를 보고 길길이 날뛰는 지점장의 모습이 외계인같이 보일 것이다. 이제 무대의 뒤쪽으로 가서, 현장화 일정을 잡고 무엇을 어떻게 볼 지 계획하는 높으신 분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보자.
나는 당시 미래BG의 전략기획실장이었다. BG는 Business Group의 약자로, BG-BU-Brand-팀의 수직계열에서 가장 큰 단위다. 이랜드 한국은 당시 패션, 유통, 미래 3개의 BG로 구성되어 있었고, 미래BG는 외식과 호텔사업부를 비롯해 테마파크에 관련된 이월드, 이랜드크루즈, 코코몽 키즈카페 사업부까지 총괄하는 사업부였다. 무대의 뒤쪽에서 계획을 짜야 하는 내 입장에서 이런 다양한 사업이 있다는 것은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장점은 패션이나 유통사업부에 비해 보여드릴 거리가 다양해서 재미있다는 점이고, 단점은…… 현장에서 현장의 이동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친하지 않은 어른 한 분 태우고 20분 정도만이라도 운전해서 모셔다 드리는 게 얼마나 어색한 일인지 생각해 본다면, 회장님과 이동하는 차량 안에서 이동거리가 멀다는 게 얼마나 고역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구 이랜드 사옥이었던 신촌을 지도에 놓고, 이동거리가 한 시간 미만인 곳들을 찍어가며 동선을 짜다 보면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님에 대한 존경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다. 대충 가평과 포천, 의정부를 거쳐 일산으로 가는 일정을 짜본다. 그리고 이런 좌석배치도를 그린다.
뾰족한 방향이 스타렉스의 앞부분을 의미한다는 건 개인적으로는 엄청 웃긴 일이었다. 하여튼 저런 웃기는 배치도를 사업부에 뿌리면 그 때부터 난리가 난다. “야, 나 회장님 뒷자리는 좀 빼줘.” “마크 과장, 내가 운전하면 안될까?” 내가 받아본 가장 타당한 클레임은 이거였다. “내가 몸집이 좀 있는데, 가운데 보조석은 좀 힘들다.” 아, 인정합니다. 상무님은 바꿔드리겠습니다.
운전은 보통 전략기획실장이 한다. 그 뒤가 회장석이고 회장의 옆자리는 사업부에서 가장 높은 책임자가 앉는다. 그리고 나머지 자리에 방문하게 될 현장의 책임자나 관계자가 앉게 된다. 처음으로 가게 될 현장이 이랜드 축구단의 연습구장이 있는 곳이어서 광고와 조경 담당까지 동행하게 되어 인원이 좀 많아졌다.
봉고 MBWA를 위해 준비해야 할 많은 것들 중 내가 가장 어려워했던 건 간식준비였다. 눈치껏 전날 차를 받아와서 세차까지는 했는데, 막상 출발하려니 뭔가 허전했다. 경험이 있는 선배에게 수소문해서 물, 귤, 에너지바 정도를 사두었다. 이제 출발이다.
봉고 MBWA 당일이 되었다.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난 길을 잘못 들었다. 신촌에서 첫 코스인 가평으로 가려고 강변북로를 타려 했는데 시내에서 입구를 잘못 들어갔다. 두 블록을 헤맨 뒤 강변북로를 타자 출근길 차량이 너무 많았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장면이었다. 물론 운전하는 내 손에만 땀이 났겠지만, 회장님 옆에 앉아계시던 전무님도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저 쉐이가 길치라는 건 알았지만 이런 날까지…… 차가 출발하면 회장은 보통 신문을 읽는데, 다행히 이 날은 신문을 좀 오래 읽으셔서 첫 대화를 시작하기 전 어느 정도 시내를 벗어날 수 있었다.
어찌어찌 1차 목적지인 켄싱턴리조트 청평점에 도착했다(현재는 켄싱턴리조트 가평점이다). 외부 시설들을 돌아본 후 건물 로비까지 무사히 진행되다가, 지하 시설을 돌아볼 때 문제가 터졌다. 당시 청평 리조트에는 서울이랜드FC 축구단의 선수 라커룸이 있었는데, 그 앞에 붙어있는 글씨체가 맘에 안 드는 거였다. 한참 동안 화를 참으며 바라보던 회장의 한마디, “저건 누가 했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돌아나오며 다시 1층 로비까지 올라오는 동안 회장은 세 번 뒤돌아보며 역정을 냈다. 역정은 단계별로 진화하다가 로비에 올라와서 결국 폭발했다. 그리고 그 날 미래BG 역사상 길이 남을 대사가 나왔다. “대표이사 빼고 다 내려!”
음, 난 운전자인데. 이제 대표이사님이 운전을 하셔야 되는건가? 내가 이전까지 들어본 봉고 MBWA 사상 최악의 스토리는, 회장님이 혼자 내려서 택시 타고 가셨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대표이사 빼고 다 내리라는 지시까지는 내 시나리오엔 없었다. 지시대로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표님, 여기 키 드려요?
다행히 회장은 추가지시를 했다. “전략기획만 남아.” 그럼 10명이 타고 출발한 봉고에는 나를 포함한 3명의 전략기획자와 회장, 대표이사 총 5명이 된다. 쫓겨난 5명의 경영자들은, 물론 가라고 했다고 진짜 갈 수는 없어서 뒤에서 서성이고 있는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주셨지만, 한 소리 더 듣기만 했다. “다 내리라고 했잖아!”
그 뒤로 난 혼이 반쯤 나가있는 상태였다. 회장이 밖에서 타려고 할 때 차 문을 잠그기도 했고(“이거 빨리 열어!”), 하이패스를 부착한 차로 현금 정산 코너에 들어가기도 했다(자네… 어디가나?). 봉고 MBWA에서는 원래 운전자에게는 거의 질문을 하지 않는데(그래서 다들 운전석을 희망하고 부러워하는데), 이 날은 예외적으로 자꾸 운전석과 조수석에 질문이 쏟아졌다. 뒤에서 질문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다 하차 당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운전하면서 룸미러로 자꾸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대답도 해야겠고, 혼미한 정신으로 운전하려니 정말 사고라도 낼 것 같아 핸들을 움켜쥔 손이 저릴 지경이었다. 바로 그 때, 회장님께서는 내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말씀을 해주셨다.
“자넨 보니까, 너무 안 웃어. 레저 쪽 사업을 하는 사람인데 얼굴이 웃는 상이 아니야.”
정말 진심으로 활짝 웃어버릴 뻔 했다. 아이고 회장님, 본인이 회장을 안 모셔보셔서 모르시나 본데,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진 않을 겁니다…… 그 뒤로도 시트콤 수준의 해프닝들이 벌어졌다. 회장이 안전벨트를 잘못 옆 좌석 소켓에 꽂으려다가 잘 안되니 성질이 난 거였다. “저번에도 이거 고장 났었는데 아직도 안 고쳤나? 다들 회장 안전에 대해서 아무 생각이 없어! 이거 수리 안 한 직원 짤라버려!”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기 전에 조치를 했다. 옆 좌석 소켓은 안 보이게 시트 사이 구석 깊숙이 박아버리고, 올바른 소켓만 뽑아서 좌석 한 가운데에 올려놨다. 그래, 애초에 준비를 철저히 안 한 내 잘못이려니. 안전벨트 때문에 짤린다면 그건 희극일까, 비극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