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기한은 짧을수록 좋다는 깨달음
출간 기획서, 목차, 샘플 원고 정도로만 출판사에 원고 투고를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나의 경우 초고 탈고 후 출판사 투고를 진행했기에 출판사에서 요청한 수정. 보완 작업 외에 나 스스로 눈에 걸리는 부분들을 다듬기만 하면 된다는 점에서 초고 탈고 때처럼 맘의 부담이 크진 않았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이미 계약을 한 상황에서 오는 마음의 무장해제와 넉넉해서 부담 없는 마감기한.
난 나 자신을 너무 잘 안다. 내가 이러리라 어느 정도 예상했다. 마감기한이 일주일이었으면 매일 밤을 새워가면서 작업을 했을 거고 3주면 3주만큼의 여유를 갖고 작업했을 거란 걸... 그리고 기한에 관계없이 결과물은 결국 똑같으리란 걸....
내가 알고 있는 나를 뛰어넘을 때의 뿌듯한 만족감과 희열이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횟수만큼 내적 성장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나를 뛰어넘지 못하는 한 가지가 바로 넉넉한 기한이 주어졌을 때 내가 보이는 행태다. 공적 영역인 조직생활에서는 뭐든 후다닥 끝내버리는 내가 나 개인에 국한된 일일 경우 한 없이 늘어질 때가 있다.
이번에도 결국은 금요일까지 원고를 보내기로 하곤 일요일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보냈다. 금요일 밤 11시 59분에 보냈든, 일요일 새벽에 보냈든 담당 에디터님이 월요일 출근 후 확인할 거라는 사실은 동일하다. 하지만 이 부분이 마감기한을 넘겼다는 사실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난 왜 이 모양일까'하는 자책을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
퇴고(推敲)는 한자로 밀 '퇴', 두드릴 '고'다. 미는 것과 두드리는 것이란 뜻으로 글 집필 시 문장을 가다듬는 것을 말한다. 퇴고 작업 중 느낀 건 마지막 탈고까지 고칠 부분은 계속 눈에 들어오고 원고를 보낸 후에도 계속 눈에 띈다는 사실이다. 원고를 보낸 후에도 난 여전히 밀고 두드리는 중이다. 계속해서 눈에 걸리고 밟히니 나의 의식의 일부는 여전히 글에 머물러 나머지 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차피 2차 수정 보완 요청이 있을 거라 미리 예상하고 다시 여기저기 손 보는 중이다.
출간에 적합한 원고의 기준이란 게 있기는 한 걸까? 각 작가마다 그 기준이 다를 테니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아직은 누군가의 '작가님'이라는 호칭조차 면구스러워 헛웃음으로 어색함을 때운다.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세상이라지만 그 '누구나'가 '아무나'는 아니라는 걸 작업 중 느꼈다. 직업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글을 생산해낼 수 있는 경험치와 그 경험에서 내가 순간순간 느끼고 사유했던 횟수, 이로 인한 사고의 확장 및 성찰이라는 오랜 기간의 과정이 오롯이 담기는 작업이란 걸 알았다.
거기에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의 과정과 책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았던 내 인생의 여정도 여기저기 흔적을 남긴다는 것도 알게 됐다. 내가 쓴 글이 과연 지금의 나와 얼마나 일치하는지에 대한 반성도 따랐다. 사고의 미성숙함으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기도 하고 직설적으로 말의 비수를 꽂기도 했던 20대의 '나'의 모습이 책 집 필 과정 중 생각의 언저리를 계속해서 맴돌았다. 못났던 시절의 반성을 자꾸 되새김질하는 이유는 내가 누군가에게 경험과 조언을 쏟아내는 자기 계발서를 쓸 수 있는 그릇인지에 대한 사유와 연결된다. 쌓아온 과거의 시간을 바탕으로 존재하는 현재의 나는 책의 화자와 일치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자격에 대한 질문이었다.
생각의 흐름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의 중요성도 깨달았다. 이 흐름이 한번 깨지면 이전의 집중력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바쁠 때 몰아치는 게 낫지 여유를 가지려고 하는 순간 흐트러진다. 물론 안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다. 3주간의 탈고 작업이 다시 한번 내가 그런 사람이란 걸 확인 사살했다.
책의 주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이후 우리는 어떤 사고체계를 갖춰 근본적인 변혁을 해야 하는지와 그 방법론이다. 철저히 조직과 조직원의 관점에서 풀었다. 하지만 살면서 느낀 건 사고체계란 장소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 역시 HR 직무를 맡고 역량개발을 위한 에너지를 쏟으면서 나, 사람, 인간 심리 등의 좀 더 근원적인 부분으로 다가갔고 결국 '나'자신에 대한 성찰과 성장으로 이어졌다. 애초 HR 직무에서 시작했지만 '나'로 연결됐고 나의 삶 전반이 변화했다. 사고의 변화란 공적 영역인 조직에만 발휘되는 게 아니라 전 영역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그 과정을 통해 일상의 삶도 변한다. '나' 자신이 명확하고 단단해지기 때문이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에서 ‘인생의 꿀팁’ 같은 조언들을 쏟아내지만 결국 수용과 변화라는 선택은 각 개인의 몫이다. 책을 읽는 행위는 매우 정적인 듯 보이지만 책의 영향을 받아 사고를 확장하고 변화하는 선택을 하는 행위는 매우 동적이다.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이다. 부끄럽지만 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조금 달랐던 한 가지는 드라마나 영화를 보든, 책을 읽던, 어떤 기사를 접하던, 누군가와 대화를 하던, 아니면 일상에서 부딪치고 겪는 상황 속에서건 늘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사고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가 보다'가 아니라 또 다른 사고로 확장하고 나의 생각이나 의견으로 정리하는 무의식적 습관 같은 게 있었다. 그 습관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생산자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집필 중반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생산해내는 크리에이터가 되려면 가장 먼저 점검해야 할 건 집중력을 발휘하기 전의 예열 기간을 줄이는 거라는 걸 이번 원고 퇴고와 탈고까지의 과정을 통해 확실히 느꼈다. 에디터님이 또 다른 데드라인을 제시하더라도 나 스스로 조금은 빡빡하고 부담스러운 날짜를 역 제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게는 다소 빡빡한 마감기한이 집중력을 높인다는 깨달음.... 짐작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언젠가 이 또한 넘어서는 성장을 할 수 있겠지?
*이미지 출처 : 모두 개인소장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