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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성훈 Dec 07. 2022

『사물들』- 2. 자전거


* 완벽한 전진     

My two favorite things in life are libraries and bicycles. They both move people forward without wasting anithing. 

The perfect day : Riding a bike to the library.  

(내가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는 도서관과 자전거다. 이것들은 어떠한 낭비 없이 사람을 전진시킨다. 가장 완벽한 하루는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에 가는 것이다.)


                                                                                                    -Peter Golkin      

                                  

 한창 논문을 쓰기 위해 국회도서관을 들락거리던 때 나는 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당시 나는 전공이 문학이라 말할 순 있었지만 문학은 쉬이 내 길이 되어주지 않았다. 시론과 작품론 같은 것 중심으로 문학을 이해했고 정서적 글쓰기로부터 모든 기반과 태도가 훈련되어있던 시절. 비평적 혹은 학술적 글쓰기와 나의 글쓰기 태도 사이에서 끝없는 괴리에 몸서리치던 그때 나는 운동으로 그 고통스런 공백을 메우려 했었다. 내게 도서관은 대중교통으로 가기에는 접근성이 떨어졌고 여러 번 갈아타고 걸어야 하는 곳이었다. 기동이 힘든 것은 괜찮았지만 도착해서 피로하면 모두 소용없는 일인데다 운전으로 가기에는 유류비와 주차비가 부담스러웠다. 도서관에 가기 위해 자전거를 구한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내 자전거는 도서관에 갈 때에 가장 빛났던 것 같다. 요즘은 ‘페달 밟기’ 그 자체를 위해 자전거를 사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자전거의 편의성을 이용하기 위해 페달을 밟기 시작했으니 어찌 보면 시작은 다소 구식 정서로 접근했다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지 사실 나의 성향은 요즘 국내에서 끊임없이 인기를 끌고 있는 레저인 로드자전거나 MTB 라이딩 문화에는 잘 맞지 않았다. 물론 나도 타다보니 자전거가 점점 좋아져서 동호회에도 들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 문화를 향유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런 건 그만두었다. 그들처럼 자전거 그 자체가 목적이 되게 타 보기도 하고 가볍고 빠른 로드자전거와 함께 그 문화를 접해보기도 했지만 그저 어딘가에 가기 위해 자전거를 이용하는 것이 좋았을 뿐이던 나는 자전거 타는 일 자체를 위해 일부러 사람을 모으고 목적을 만드는 행위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그 납득할 만한 명분이 있다는 건 이해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런 식으로 자전거를 타지는 않는다. 세상엔 물론 비생산적, 자기만족적이면서도 가치 있는 일들이 있다는 걸 알지만 좀 더 생산적이면서 가치 있는 일들 또한 많고 개인적으론 그 쪽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자전거 타는 일이 얼마나 좋은 운동인지는 이미 세상에 지겹도록 잘 알려져 있다. 근력보다는 중력과 관성을 이용하게끔 하고, 그로 인해 다리운동은 잘 되면서 조깅보다도 무릎 관절에 무리가 훨씬 덜 가도록 한다. 그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자연스레 코어운동으로 유도하며 그로 인해 가장 힘들다는 복부지방 빼기에 큰 효과가 있다는 것만 알아도 이 운동의 유익성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나의 자전거 타기는 다음과 같았다. 쓰러지지 않으려면 페달을 계속 밟아야 하는 자전거처럼, 해도 해도 논지가 서지 않는 연구를 완성하기 위해선 생각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 단순한 생활의 이치들과 ‘페달링’이라는 행위는 예로부터 너무도 직관적으로 맞아떨어지게 마련이었고 내게도 그 점이 여건상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동안 내게 자전거 타는 행위는 공부를 하는 행위와 운동을 하는 행위, 즉 정신과 육체의 쓰임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흩뜨리는 어떤 매개체였다. 그리고 학문을 하거나 사무를 많이 하는 사람의 부류는 운동을 해서 자기 몸을 다잡을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육체의 피로는 육체의 보강으로 거의 극복이 가능하지만, 정신적 피로는 잘 극복되지 않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별로 없게 마련이다. 그런데 육체적 극복은 정신의 치유에 생각보다 많이 관련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인간의 두 가지 소유 모두를 전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한 욕심을 부렸고, Golkin의 발언을 접하곤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에 안부 인사처럼 반가워했었다.      

 인간은 걸을 때 진짜로 ‘전진’하지 않는다. 인간의 반쯤 떠 있는 두 발의 불안한 움직임이 모여 그에게 대강의 방향성을 주게 되고 우리는 그저 우리의 전진성을 믿을 뿐, 이것이 인간의 걸음이다. 그러나 자전거는 발바닥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즉 자력을 발이 아닌 바퀴에 전달하는 순간 사람은 나의 온몸을 방향의 개념으로 ‘밀고’가는 본질적 전진을 경험하게 된다. 앞서 그의 말에 나의 감상적 경험을 덧붙여 보자면 공부는 전진이 ‘가능’케 하고 자전거는 전진을 ‘실감’케 하는 사물이다.    


        

* 구입 가능한 행복     

You can't buy happiness, but you can buy a bicycle and that's a pretty close.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자전거는 돈으로 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행복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 Anon     


  ‘기술’이나 ‘과학’과 같은 단어만큼이나 건조하고 금속성으로 들리는 단어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일단 듣기에도 ‘낭만’이나 ‘정서’ 같은 단어들과는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 관념의 탓일 뿐, 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선입견은 오랜 세월 굳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버틀런드 러셀의 입장을 빌려, 인문 혹은 철학의 정서란 새로운 물음을 생산하고, 그것이 해결 및 증명을 거치면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그 둘은 양가적 관계가 아니라 차라리 인과관계에 가깝다. 이렇게 이룩된 사유들 속에서, 우리에겐 구조가 지극히 단순하고도 역학원리의 중요한 ‘기술’인 동시에 인간에게 수많은 ‘정서’적 측면을 제공하는 미묘한 위치의 사물이 있다. 이는 결국 정서를 뒷받침으로 이룩된 과학이 있고 과학기술을 통해 구축되는 어떤 정서가 있다는 의미가 될 터인데, 그 경계에 선 채로 우리의 곁에 널리 있는 미묘한 사물이 있다. 내 생각에 그 대표적인 것은 카메라와 자전거다. 물론 전자는 ‘정서’ 그 자체에 훨씬 가깝고 후자는 ‘기술’ 쪽에 더 가까울 순 있겠지만 인간이 가진 거대한 두 특성의 중간좌표쯤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자전거와 인간이 ‘역학적’으로 만나는 접점은 크랭크이고, 크랭크는 인간의 의지와 동력학이 맞물리는 ‘인문적’인 시작점이다. 그래서 ‘페달’은 자전거라는 사물을 통해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수사(修辭)가 되어왔다. 그중 유명한 격언 중 하나로 ‘인생은 자전거와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계속 움직여야만 한다(Life is like riding a bucycle. To keep your balance you must keep moving.)’라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곧 시간과 인간의 불가역적 전진성을 자전거가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크랭크 위에서, 그리고 옆에서 나는 몇 번이나 만나고 헤어진 연인과 함께 했다. 그녀는 매사 어린아이 같았고 그래서 대체로 미묘하고 대체로 복잡했다. 모든 연애는 입을 떼는 걸로 시작되고 말 한마디에 헤어질 수도 있으니 그것은 곧 말과 같은 선상에 있는 어떤 전진 의지였다. 말로 상처를 주고 말로 상처받던 나는 지금, 연애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말에 대해선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복잡한 것을 쉽고 단순하게 담을 수 있는 것이 말의 무게이고 단순한 이치나 의미를 복잡하고 미묘하게 펼치는 것을 기교라고 한다면, 나는 후자가 전자보다 경박한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이 상대를 어렵게 대하고자 하는 예(禮)에 가까워진다면 후자가 전자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삶에는 무엇을 말할지 보다 어떻게 말할지에 더 무게가 실릴 때가 있고 그래야 나와 당신의 관계에서 그 다음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얼마만큼 사랑하는지에 대해 말하려는 것처럼, 그때 자전거는 행복을 목적으로 한다기보다는 행복의 지향에 가까운 사물이었다. 

 사색과 여행을 할 수 없던 당시의 나는 사색과 여행을 좋아하던 예의 그에게 무겁지만 예쁜 자전거를 선물했다. 거기에 전조등을 장착하고 바람을 넣으면서 그땐 그것이 행복이라 여겼다. 당시 나는 위와 같이 자전거를 사는 일이 행복을 사는 수준의 일이라는 식의 어떤 달콤한 말을 알진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행복의 기계적 형태가 있다면 자전거의 형태를 닮았으리라는 생각은 해 보았다. 실제로도 그랬고 그가 늘 나로 인해 행복할 수 없었지만 내가 남긴 사물로는 좀 더 행복할 수 있다고 느꼈으니까. ‘사랑이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그것을 원하지 않는 이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다.’ 라는 라캉의 명제를 나는 그때 어리석을 만큼 충실히 따라가고 있었을 것이다. 복잡한 감정은 복잡하게도 단순하게도 대응할 수 없는 것이니 나는 단순하게 내가 좋다고 느낀 것을 건네주는 단순함으로 만나려 했다. 그게 그때의 최선이었으니까. 나는 내가 차라리 사물에 가깝고자 했을 때가 있었고, 대체로 행복하고 대체로 어려웠다. 내겐 불행하고 쉬운 것보다 그 쪽을 추구하는 것이 나았을 것이고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고양이가 주인에게 애정표현으로 토막 난 쥐를 물어오지만, 쥐가 고양이와 주인 모두의 전진을 말해준다고 생각하면 주인도 고양이도 행복할 것이었다. 

 크랭크 위에서건 크랭크 옆에서건 함께 앞으로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자전거는 행복이거나 그에 가까운 무엇일 수 있어야 옳았다. 잠시나마 함께 페달을 밟았던 때, 그때는 내가 구입했던 것이 바퀴 둘 달린 단순한 기계일수도, 상대와 나 사이의 균형추였을 수도 있지만 그게 무엇이었든 토막 난 쥐보다 행복한 것임은 분명했다.             



*도서관 가는 도서관     

Get a bicycle. You won't regret it, if you live. 

(자전거를 한 대 사라. 살아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Mark Twain     


 자전거 하나로 어떤 길이든 갈 수는 없지만 모든 길은 자전거로 갈 수 있다. 속도를 버리면 더 많은 길과 자연지형을 만날 수 있고 여러 지형을 포기하면 효율과 속도를 얻을 수 있다. 물론 이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산악자전거(MTB)와 로드자전거 설계의 예가 그렇다. 어느 쪽이든 자전거는 인간의 보행보다 평균 10배가량의 에너지 효율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심미적 인문적 위치까지 걸쳐져 있으니 어떤 의미에서 자전거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일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론 속도 쪽을 포기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둘 다 조금씩 버렸을 때 가장 많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수가 아닌 보통사람이 굳이 짜릿함과 재미를 위해서 다운힐 경기처럼 산꼭대기에서 80km이상의 속도에 목숨을 걸고 아래로 내리꽂을 필요도 없고, TDF(뚜르 드 프랑스)경기에서처럼 인생을 올인 하듯 골격근이 터지도록 앞만 보고 소수점을 다투며 질주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서 희생해야할 일이 보통 사람들에겐 너무 많고 그럴 필요도 없다. 스포츠는 인생과 닮은 점이 많지만 인생이 스포츠와 닮았다고 생각하면 위험한 것이다. 자전거 타기 자체가 목적이 되었을 때의 시공간 개념 속에서, 속도는 일종의 허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령 무릎 관절은 고관절과 함께 인체의 가장 중요한 부위이므로 절대 무리하지 말 일이다. 우매함인지 성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위와 같은 생각을 안장 위에서 처음으로 해 보았었다.


 나는 공부의 개념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많은 의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새로운 형태나 양상으로서의 의문을 끊임없이 가질 수 있게 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게 가능하기 위해선 많은 것에 대한 현재의 답을 알아야 하겠지만 생각하는 시간과 기회는 많이 가질수록 좋을 것이다. 사유의 힘은 육체의 건강함과 인문적 사유가 함께 갈 때 키워진다는 점에서 도서관에 가는 자전거는 그 자체로 낮선 사서(司書)일 수 있다. 이는 나의 소소한 욕심. 불가역적 시간 속에서 너에게, 혹은 나에게 오롯이 전진하고 있는 나를 실감할 때, 두 바퀴 형태를 한 어떤 행복이 노면을 구를 때. 생각과 사랑에 바람을 넣고 전진뿐인 우리의 시간에 기름을 치면서 나를 맞바람 앞으로 밀어 넣을 그때 비로소 나에게 온다. 나는 오래된 하상도로의 가을 속에서 그 언젠가의 당신을 만나고, 뒷바퀴가 앞바퀴의 궤적을 따르듯 우리 위태로운 영혼의 불가역을 이해하고, 또한 나의 새로운 행복을 체감하기 위해 다시금 페달을 밟아보는 것이다. 도서관으로 가는 도서관. 가지 않아도 도서관.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나는 자전거와 행복을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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