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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 Aug 29. 2022

좋아하는 일에 미쳐야 한다는 불안

서른 하나, 여전히 원하는 걸 잘 모르겠어

괜찮은 척, 신체화

"엘리님은 지나치게 괜찮은척하고 계세요."


몸이 아파지기 전까지는 어지간한 일은 내게 별 일 아닌 것 처럼 보였다. 마음이 요동칠 때면 요가를 하며 몸을 찢으면서 자연스럽게 침잠하길 기다렸고, 매일 일기를 쓰며 상념을 버려냈다. 머리는 괜찮다고 했다. 괜찮아야 한다고 했다.


누가 겪어도 충분히 괜찮지 않을만한 큰 일이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줄줄 났고 억울하고 화가나서 심박수가 120 아래로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나는 이유 모르게 아픈 일이 많았다. 병원에 가면 "스트레스성"이라 설명하며 특정 원인을 규명할 수 없는 각종 증상이 내 몸에 나타나곤 했다. 지난 5년간 증상도 다양했다. 두피가 하얗게 맨들거릴만큼 머리가 빠지는가 하면 어느날 귀가 안들렸고, 공황 발작이 있었다. 온몸에 알 수 없는 포진이 나서 병원에 갔더니 대상 포진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방어 기제로 "신체화"가 강하게 나타나는 편이라는 것을.

왠만한 일을 별일 아니라며 열심히 합리화를 하지만, 사실은 그게 내 몸을 많이 아프게 했음을.


치유가 필요해서, 나를 더 잘 알고 보살펴주고 싶어서 일주일에 한번 심리 상담을 시작했다.


"기질적으로 가진 에너지가 많은데, 뭐든 다 누르시는게 익숙해지신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걸 누르고 절제하는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돼요. 그게 스트레스죠. "


"어... 그러고보니 내가 진짜 원하는걸 선택하는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아요. 진짜 원하는게 뭔지 알아채는 방법조차 잃어 버린 것 같아요."


"내가 지금 하고 싶은데 누르고 있는게 뭘까 알아차리고, 하고 싶은걸 하나씩 해주세요."



절제가 미덕이던 삶

나는 절제하는걸 정말 잘한다. 술담배도 안하고, 자의로 야식을 먹는 일은 인생에서 한번도 없었다. 과소비나 시발 비용은 내 인생에 없는 일이며 번 돈의 높은 비중을 잘 모으고 불린 덕분에 나이에 비해 자산도 제법 쌓였다. 흐트러지는 건 너무 불편하고 싫었다. 스트레스로 몸이 아프기 전까지는 통제력이 내 자부심이었다.


스스로의 욕망을 허락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 누구보다 엄격했으며, 어떤 친구는 나를 금욕주의자로 정의했다.

욕망대로 산다면 동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원래 게으르게 설계된 유전자를 끊임없이 자극하지 않는다면 도태된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욕망보다, 해야만 하는 기준과 의무가 우선 됐다.

망은  마음 속에서 자동 필터링이 되어 새어나오지 못했다.


절제가 디폴트로 된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우리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환경이 익숙했다.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을 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학습하며 살아왔다. 일본인 친척이 한국에 오면 우리 집에서 지냈었는데, 7살에 제일 먼저 배운 일본어가 "다메"(하지마) 였다. 사회화가 된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들을 절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절약이 미덕이듯 절제도 미덕이었다. 이는 커오면서 학습해온 성취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특히 학업 성취는 다분히 자고 싶은 걸, 놀고 싶은 걸 얼마나 잘 컨트롤하는지와 높은 상관관계가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것들을 거스르고 시간을 통제할 수 있는, 지루한 반복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시험 성적이 대체로 높았다. 한 10년 전 쯤 유행하던 베스트셀러가 "마시멜로 이야기"였다. 어릴 때부터 욕망을 잘 컨트롤하는 사람은 높은 성취를 거둘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20년 가량, 통제가 성취로 이어지는 삶을 살았다. 성인이 되어서 갑자기 원하는 걸 알아채고 원하는 길을 선택하는 경험이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하다가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컸다. 원하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을 하는게 응당 편안하고 안전하게 느껴졌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 두고 자기 길을 가는 사람들은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도 그럴 용기가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래서 넌 뭘하고 싶은건데?" 하는 스스로의 질문에서 머뭇대곤 했다. 해야 하는 일을 토대로 하고 싶은 것을 조금 속여왔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내가 좋아하는 일인 것처럼.


괜찮은 회사에서 괜찮은 보수를 받고 일하고 있지만, 영문도 모르고 답답한 감정이 들었다. 한때는 회사와 일을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짝사랑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당장 내가 무슨 일에 전념해야 할 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는 데다 잘하는 일이 무엇이 될 지 끊임없이 유목했고, 만들곤했다. 간헐적으로 글을 쓰고, 음악을 하고, 핸드크림을 만들고, 빵을 만들었다. 앱을 개발했다. 부유할 땐 잠시나마 평화로웠다. 하지만 전념하지 않는 삶에 대해선 늘 갈증이자 핸디캡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먼저 찾은 사람들

"좋아하는 일을 찾는 비밀이 뭘까 스스로 생각해 봤는데요. 크게 두가지더라구요. 하나는 잘하는게 좋아지는 것 같구요, 다른 하나는 부러운 감정에서 투사되는 욕망인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을 먼저 찾은 친구들이 있나요?"


"네. 한명은 게임 개발한다고 퇴사했는데 인디게임 대상 받았구요, 다른 친구는 베이커리 차리더니 꽤 잘되는지 현대백화점에 얼마전에 입점했어요."


"20대 후반 ~ 30대 초반에 좋아하는 거에서 성취를 이룬 친구들은 그 분야에서 꽤 빠른 분들일거에요. 그런 분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전념하게 됐는지 생각해보셨나요?"


"글세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운이 큰 것 같아요. 다른 선택지가 별로 없었을 수도 있고, 좋아하는게 잘하는 일인 것도, 일찍 알게된 것도 확신을 갖게 되어서 결단을 내릴 기회를 만나는 것도 운이 큰 것 같아요. 저도 그래서 빨리 알게 되는 거에는 조바심 안내려고 노력중이에요. 빨리 성취하는게 무조건 좋은게 아닐 수도 있으니깐요. "


"확신이 있었을까요? 아닐 수도 있어요. 제 생각에는 그런 분들은 현재에 충실해오신 분들일 것 같아요. 처음부터 엄청 좋아하는 마음이 크진 않았을 거에요. 그냥 좋아하니까 자주 한거고. 자주하다보니 잘해지는 거고. 꼭 그걸로 뭘 해야겠다고 다짐이 들고 확신이 생긴 건 아닐거에요."


늘 머리꼭대기에서 감정적 공감보다 뼈를 때려서 좋아하는 상담 선생님은 그날도 내 머릿속을 연신쳐댔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 행복하기 위해서 중요하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저는 현재의 행복보다 미래의 행복이 늘 더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 당장 행복한 선택이 아니더라도, 오늘 맛있는걸 먹고 근사한 옷을 입는 것보다, 내 몸이 편안한 것보다, 조금 불편한게 미래에 복리로 행복을 줄거라 생각해온 것 같아요."


"제가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사람의 고민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온다. 늘 정신을 현재로 끌어오는 습관을 만드는게 저희가 할 일인 것 같아요."


다음 시간에는 내가 좋아하는 일의 비밀이라고 생각했던 "부러운 사람과, 잘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오라는 미션을 받고 그날의 상담을 마쳤다.



기준이 높은 사람

좋아하는 일을 전념해서 하는 사람에게 직접 물어본다는 생각을 왜 그동안 못했지.

문득 떠오르는 사람에게 묻기로 했다.

"언니, 언니는 어떤 마음으로 아나운서 쪽의 길로 가게 된거야? 말을 잘해서?"

"아니, 반대야. 말을 잘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을 잘하고 싶어서 학원을 등록했었어. 그러다가 흥미가 붙어서 차츰차츰 이렇게 된 것 같아. 이쪽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아마 원래 잘한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사람 생각보다 별로 없을 걸"


신선한 답변이었다. 

"나는 못하는 일을 잘하려고 노력해 본 경험이 보통 끝이 안좋았던 것 같아. 수학도 잘 못했고 체육도 잘 못했고 게임도 잘 못했어. 학교 다닐때야 성적 잘받아야 하니까 어거지로 한거지 성인이 된 다음부터는 가성비가 안나오는 일은 잘 안하려고 한 것 같아. 잘하는걸 더 잘하게 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쏟았었거든. 못하면 재미없으니까"


상담사 선생님이 했던 말, 좋아하는 일을, 현재를 즐기는 것에 집중했다는 말이 생각났다. 

만약 조금 성취가 더딘 일이 있는데 초점이 현재보다 미래에 있었다면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까? 지금 더딘 내 모습을 미래에 상상하는 모습과의 간극을 벌리는건 아닐까?


대학교 동창에게도 "원하는 일을 찾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줬다.

나이 서른 넘어, 그동안 지겹지도 않을 끝없는 나의 길에 대한 질문을 주고 받는게 퍽 우스웠다.

"원하는 일 몰입하는거, 그거 엘리가 하고 있던거 아니었어? 난 그렇게 생각했는데. 앱만드는 것도 그렇고. 내가 볼 땐 너도 그런 친구야"


"결과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 과정만 있지 아직 이렇다할 결과물이 없으니까. 세상은 결과로 평가하니까"

"평가는 누가하는데? 한번에 결과가 나오는게 어딨어"


누군가에겐 나도 몰입하는 사람처럼 비추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끊임없이 목말라했고, 만족하지 못했다. 충분하지 않았고 이대로라면 내가 훗날 성공처럼 보이는 사람이 되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선생님, 저는 늘 기준이 높은 사람인 것 같아요."

"왜 기준이 높은 것 같아요? 생각해보신 적 있어요?"

"상담을 하면서 정말 신기한게 있어요. 저는 말의 힘을 믿어요. 엘리님은 스스로를 <기준이 높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프레이밍을 하신 것 같아요. 그런데 기준이 높다는 말에는 현재 완전하지 않다는 말이 내포되어있는거에요. 자주 도달할 정도의 수준으로 기준을 낮춰보세요."



서투른 소개팅마냥

소개팅 같았다.

연애 경험이 부족한 사람의 이상형은 저멀리 있다. 모든게 꼭 맞는 사람은 분명 없을 텐데 조금만 맞지 않아도 낙제점을 주고 오래 교제하기 어렵다. THE ONE을 찾느라 여러번의 가벼운 소개팅을 해봐도 한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니 흥미가 생기다 말기를, 반복하기 일수다. 


만족의 기준을 구름같이 높게만 잡고, 원하는 일이라는게 마치 운명처럼 모든게 꼭 맞길 바라는 것, 모든게 맞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이것 저것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을 반복하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하는게 중요한 요즘 세상에서 나는 아직 좀 서툴렀다.


지금 하는 일도 언젠가는 내가 바라던 일이었다. 내가 바라던 조건에 꽤 많이 맞는 회사에 입사했다. 데이터와 예술을 같이하고 싶어서 입사했다는 뜬구름 잡는 입사 포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융합적인 일을 한다. 다만 몇가지가 아쉬울 뿐이고 실망과 아쉬움이 커져서 좀처럼 몰입하기가 힘이 들었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확신이 없다는게 참 불안했다. 그렇다고 열심히 안산 건 아니다. 늘 열심히 살았다. 내가 쓸모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살았을 뿐.



점심 메뉴 고르는 연습

원하는 내 운명같은 일은 아직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알고 있어도 현실과 달라 부인하고 덮어두지만

적어도 원하는 점심 메뉴를 선택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메뉴, 옷, 전자제품을 사는 것을 힘들어한다. 매번 최선의 선택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세서 이런 저런 요소를 고려하느라 마음에 가는 선택을 한 적이 별로 없다. 점심을 먹을 땐 땡기는 것보다 칼로리가 적거나 저렴한 것을 선택했고, 리뷰가 보장하는 음식점이 아니라면 가기 꺼려졌다. 전자제품은 각종 리뷰를 섭렵하느라 몇달을 쏟다가 신제품이 곧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다가 결국 사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점심메뉴 만큼은 직관에 의해 선택하는 것을 연습 중이다. 이건 잘못 선택해봤자 좀 맛없는 음식을 먹을 뿐이니 리스크가 적었다. 선택에도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많이 할 수록 더 잘하게 되고 원하는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좋아하는 일이 뭔지 여전히 모르겠다는 어른들이 많다. 진짜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나도 저렇게 뜨거워져볼텐데 왜 나는 이리도 미적지근한건지. 좋아하는 걸 우선적으로 선택해온 사회에서 살지 못했다. 시대의 흐름은 내 마음보다 조금 더 빨리 흘러서, 이제야 좋아하는 거에 미쳐살라고 하는데 도무지 뭐에 미쳐야 할 지 모르겠는 불안감. 열심히는 살고 있지만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사는지 불명확하고 기준 없이 내 마음 가는대로 선택하는게 힘들다. 


위로가 됐음 좋겠다.

나처럼 유랑하는 어른들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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