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공부 중이던 막내딸이 권리장전이 잘 모르겠다고 물어봅니다.
아빠는 사족이 너무 길다며 절대 질문하지 않겠다던 아이의 질문이니 정말 모르겠나 봅니다.
공부한 지 오래된지라 대충 참고서 한 페이지를 훑은 뒤 떠오른 생각을 정리해서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제임스 2세라는 왕이 있었는데"
"2살에 왕을 할 수도 있어요?"
"네가 중학교 2학년이라고 정신연령이 2살이 아닌 것과 비슷해."
"아~ 아빠는 진짜 아재가 맞네. 농담도 구별 못하고."
"시끄럽고. 일단 내용에 집중해."
딸은 평생 아빠를 놀리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잠시 생각해 봤습니다.
"그 두 살 어르신이 왕이란 말이야. 그러니 자기 권력을 강화하고 싶었겠지.
그런데 영국은 이미 의회라는 것이 존재해서 절대 왕정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라였어."
"의회는 지금도 있잖아요. 그런데 왕이 마음대로 하려고 해도 돼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시대고 저 시대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시대라고 보면 돼."
"그래서 왕이 겁이 없었구나."
"아무튼 왕은 다시 왕권이 강한 나라를 만들고 싶었고 국왕 휘하의 군대를 두려고 했어."
"왕의 힘이 세지겠네요."
"그럴까 봐 의회가 들고일어났어. 의회는 왕의 딸과 사위랑 손잡고 왕을 몰아냈지."
"뭐야. 이건 막장 드라마잖아요. 그게 말이 돼요? 딸이 아빠를 몰아내게."
아내는 부녀의 대화에 이미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이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려고 무리한 비유를 제시했습니다.
"만약에 네가 결혼해서 남편이 있는데 아빠가 너희 부부한테 하기 싫은 일을 하라고 하면 어떡할 거야?"
"당연히 안 한다고 하죠. 내가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해요!"
"봐 너는 제임스 2세 딸보다 더했으면 더 했지 덜하진 않아."
"그렇구나. 완벽히 이해했어!"
딸은 흡족한 표정으로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정작 질문한 권리장전의 핵심은 듣지도 않았습니다.
성적이 안 나오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자랑스러운 류완's 2세
공부를 하긴 했는데 가정 파탄의 역사만 배웠습니다.
역사가 이래서 어렵습니다.
갈등과 분쟁의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평화롭게 사는 내용은 공부할게 별로 없습니다.
현실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평화롭게 살았습니다.'는 동화 속 결말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순간 새로운 전쟁이 시작됩니다.
20년 전에는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축하한다'라고 대답해 주었지만
요즘 주변에서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고생해라'라는 말이 튀어나옵니다.
물리적 거리가 멀수록 갈등의 요소도 적어집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브라질 혹은 아르헨티나 보다 중국, 일본과의 갈등 요소가 많습니다.
국가 간에도 그러한데 사람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옆 동네 사이 보다 윗집 아랫집 갈등이 더 흔하게 일어납니다.
당연히 한 집에서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함께 살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법이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가족 간의 관계는 저마다의 약속들이 지켜져야 행복합니다.
그러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불편하고 괴롭다면 함께하기 어렵습니다.
공부 안 하는 막내딸이 꼴 보기 싫으면 집안 분위기가 싸늘해집니다.
공부 못해도 되니 그냥 자기 인생을 사랑하면서 즐겁게 살기를 바란다면 공기가 달라지겠지요.
딱히 정해진 답은 없습니다.
가족마다 우선하는 가치는 다를 테니까요.
가족 권리장전이라 부르면 어떨까요?
함께 즐겁기 위해 서로 지켜야 하는 기준을 말입니다.
사랑, 배려, 인내, 미소, 나눔 같이 우리 다 알고 있는 건 잠시 밀어 두고
느슨한 권력 속에서 여유를 찾는 가족의 모습을 찾아가자고 선언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내가 가진 작은 권력을 내려놓습니다.
적어도 아이들에게 공부 안 한다고 뭐라 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래도 방은 좀 치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