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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불 Mar 02. 2022

사막이 숲이 되기까지

다수보단 소수

많은 이들이 학교에 들어간다. 많은 이들이 학교를 졸업한다. 많은 이들이 시험을 친다. 많은 이들이 준비를 한다. 많은 이들이 취업을 한다. 많은 이들이 올라가려 한다. 많은 이들이 무언가를 사들인다. 많은 이들이 그 장소를 간다. 많은 이들이 무언가를 먹는다. 많은 이들이 누군가를 만난다. 많은 이들이..........




인간은 무리 속에서 태어나 무리 속에서 살아간다. 주변 사람들은 인간에게 '넌 특별한 존재야, 넌 소중한 존재야, 너의 인생은 소중해'라고 말하지만, 막상 그들이 들은 대로 살아가려 하면 '왜 너밖에 모르냐, 우리는 안 보이냐, 그렇게 이기적인 존재였나, 우리가 싫으냐, 사회가 싫으냐, 적응하지 못한 걸 보니 나약하구나'라는 말들도 인간의 앞을 가로막는다. 도대체 어디에 장난을 맞추어야 할까. 장단을 맞추면 줏대가 없다고 난리, 줏대대로 행하면 혼자 사는 세상이냐고 난리. 그렇게 인간은 혼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두 가지 선택을 한다. 자아를 죽이거나, 세상을 죽이거나. 


자신의 내면 속에서 외치는 목소리를 죽이고 타인의 목소리대로 살아가면 편하긴 하다. 적어도 인간들 속에 존재한다는 느낌은 받으니 말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있다. 나인데 나가 아닌 것 같다. 분명 살아가는데 살아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분명 행복한데 이상한 행복이다.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내가 있는 이곳에 내가 없다.


사람들이 뭐라 하던 나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방법을 찾아본다. 그런데 앞이 막막하다. 도대체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보이지 않는다. 사막 한가운데 놓여져서 내가 혼자 나무를 심고 우물을 길러내야 하는 판이다. 밤낮으로 연구해서 씨앗을 심고 물을 길어오고 나무가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갖 연구를 다한다. 나를 응원해주는 이보다 돈도 안 되는 일,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해서 뭐하냐는 식의 따가운 시선이 더 많다. 난 그저 나의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인데 이 세상은 외로움만 던져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백억의 인간들, 그들이 모두 같은 인간들일까. 태어난 방식도, 생김새도, 취향도, 목소리도 모두 다른데 과연 같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나하나의 인간들이 모여 수백억의 인간이 된 것뿐이다. 수많은 과거가 모여 현재의 우리를 만들어냈지만, 그 과거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고 별개로 존재할 수 있듯이, 인간도 수많은 인간이 모여 수백억의 인간이 존재하지만, 그 인간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고 별개의 존재이다. 이미 존재 자체로 특별하게 태어난 인간인데, 모두가 같은 인간이 되길 원한다. 같은 코스를 걷길 원한다. 조직 내에서 적응하길 원한다. 취향이 다른 자를 이상한 자로 평가한다.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자를 자기 멋대로 하는 자로 비난한다. 색다른 시선으로 표현하는 자를 정신이 이상한 자로 낙인찍는다. 


하지만 사막을 지켜내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막이 숲이 되어 세상을 살릴 수 있었을까, 세상을 색다르게 바라보는 자가 없었다면 우리가 그렇게나 치유받는 예술의 세계를 만들었을까, 다른 방식으로 일하는 자가 없었다면 새로운 시스템이 나올 수 있었을까, 독특하게 살아가는 자가 없었다면 세상에 수많은 발명품들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다수의 비난을 받는 누군가가 알고 보면 그 다수를 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 한 방울 나지 않던 사막을 울창한 숲으로 만드는 자는 무리 지어 다니는 다수가 아닌 묵묵히 제 일을 행하는 소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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