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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꾸밈 Jul 31. 2020

식문화 이야기 (식사도구로 보는)

서양의 중세와 고려를 함께 보다.

오직 종교만이! 오직 신만이!
중세를 암흑기라 부르는 것은, 예술도 인간도 종교 안에 갇혀있었기 때문이죠. 그 중세의 유럽에는 지금과 같은 미식(美食) 또는 가스트로노미(gastronomy)의 개념도 없었고 테이블 세팅을 하더라도 식기와 도구가 부족했답니다.

가스트로노미(gastronomy) = 미식(美食)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과 관련된 예술, 기술.
19세기 말 미식 작가 샤를몽슬레(Charles Monselet)는 미식을 ‘어떠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나이의 사람들이라도 모두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라 정의했다.
가스트로노미라는 단어는 조제프 벼르슈(Joseph Berchoux)의 저서 『가스트로노미 또는 식탁의 농부(la Gastronomie ou l’Homme des champs à table)』가 출간된 1801년부터 회자되며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크로즈 마냥(Croze Magnan)의 『파리의 미식가(le Gastronome à Paris)』가 출간되었다.

1835년 가스트로노미라는 단어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전에 등재되면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미 16세기에 라블레는 자신의 책 『팡타그뤼엘 제4서(le Quart Livre)』에 대식가들로부터 존경받는 ‘가스테르 나리(messire Gaster)’를 등장시킨 바 있다. 한편 미식을 언어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것은 미식 아카데미의 설립자이며 미식계의 황태자라고 불렸던 퀴르농스키(Curnonsky)였다. 그는 지역 특산 향토음식 찾아 여행하는 미식 애호가들을 가리키는 가스트로 노매드(gastronomade, 미식 유목민이란 의미)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중세 귀족들의 식사장면

손으로 음식을 먹는 중세 귀족들이 보이시나요?

컵도 보이지 않네요. 목제, 주석, 은기 외에 경질 자기 그릇이 없었던 유럽. 상상이 안되죠? 우리는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성대한 연회가 열리는 중세시대를 봤기 때문이죠. 유럽 최초의 도자기가 마이센의 자기 공장에서 만들어진 것이 1710년이니 중세 유럽은 경질 도자기의 존재조차 몰랐을 거예요.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국에서 물품을 가득 싣고 돌아가던 포르투갈 상선 산타리나호를 대서양에서 강탈해 상선에 실려 있던 청화백자 접시와 사발들을 보게 되었죠. 네덜란드 사람들이 처음 본 그 그릇들은 석기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마욜리카만을 사용하던 그들 눈에 마치 하얗게 빛나는 보석, 아니 그보다도 값어치 있느껴졌을 거예요.

마욜리카: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에서 발달한 석유, 석회 도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에스파냐의 마요르카섬을 거쳐 이탈리아로 수입되었기 때문에 ‘마욜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독일 마이슨에서 본격적으로 경질 자기를 생산하기 전까지 유럽에서 프랑스 파이앙스와 이탈리아의 마욜리카는 가장 각광받는 도자기였다.

그들은 암스테르담 항구에서 청화백자와 중국 그릇들을 경매에 붙였는데, 경매에 참여한 사람들의 반응 역시 완전 흥분의 도가니였다고 해요. 이 경매야말로 유럽인들이 대규모의 중국 자기를 접할 수 있었던 최초의 사건이었고 이렇게 1602년은 근대 유럽 도자사(陶瓷史)에서 커다란 분수령이 되었죠. 얇고 단단하고 희고 빛나는 도자기를 만들기 위한 유럽의 집념이 시작됐으니까요.

중세 시대를 재현한 식탁들

좌측은 14C 수도원의 식사 장면을 재현한 작품입니다. 식탁 위에는 빵이 놓여 있고 컵은 두 개뿐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도자기 종류의 그릇도 보이지 않네요. 자기를 생산할 줄 모르던 그들은 트랜처(tranchoirs)- 타랑쇼와르 라고 불리던 딱딱한 나무 위에 빵을 올려놓고 그 빵을 접시처럼 사용했답니다. 빵도 구운 지 오래되어 딱딱했기에 음식의 소스가 젖어 부드러워지면 교체하여 하인이나 개가 먹었다고 합니다. (위에 소개된 중세 귀족의 식사 장면 그림을 보면 개도 보입니다요.) 지금의 포타주 수프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죠. 2인당 1개(?)의 은잔을 함께 쓰고 공용의 커트러리(??)는 음식을 자르거나 덜 때만 사용하고, 손을 쓰기에 은세공을 한 핑거볼은 필수였어요. 자수 장식의 클로스가 멋져 보이지만 사실 필수적으로 필요했기에 발달한 리넨입니다. 수도원 외에는 따로 식당이라는 공간이 없어서 보통 귀족들은  계절과 손님에 따라 장소를 변경하며 간이 식탁을 설치하고 나무 널빤지를 가리기 위해 테이블클로스를 덮었거든요. 그리고 식사 중간에 손을 닦는 용도로도 사용했으니 꼭꼭 필요한 아이템이었죠. 다음에는 테이블 세팅에서 사용되는 리넨의 종류에 대한 이야기를 해봐도 재미있겠네요.

악취가 코를 찌르던 중세 유럽에서는 바닥에 꽃을 뿌리고

온몸에 독한 향수를 뿌려 냄새를 숨겼답니다. 그래서 바닥에는 꽃들이 흩뿌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리보다 요리의 외관과 향연의 전개가 더 중요했기에

마치 디너 콘서트 같은 식사를 연출했죠. 이건 고대 그리스 로마부터 이어진 서양의 식사 문화입니다.


자, 유럽의 중세는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입니다.

우리의 식문화는 어땠을까요?

프랑스가 생겨난 5세기 고구려만 보더라도 개인 각상을 입식으로 받았고 개인용 식기는 물론 수저의 사용을 볼 수 있어요. 아래 그림으로 한번 비교를 해볼까요?

고구려의 무용총 접객도(심지어 5세기)와 중세 후기(13~14C)의  그림을 비교하면  음식을 나르는 하인들을 작게 표현한 것은 동서양이 똑같습니다만, 식사 도구만 봐도 큰 차이가 보이네요. 포크 없이 나이프만 (다행히 2인 1조는 아니네요) 있고 식기들도 개인 접시는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중세와 같은 시기였던 고려의 식기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요? 궁금하시죠? ㅎㅎ

고려의 식기는 유물선의 유물과 여러 기록으로 교차 비교하여 청동, 청자, 도기를 주식기로 사용했다는 것을 증명했어요.  

고려는 신라와 발해의 자기 공예 전통 기술을 이어받고, 송나라의 기술을 결합해 11세기 자기 공예의 경지에 올랐죠. 문벌귀족들은 비색이 찬란한 자기를 원했고

이 때문에 고려청자는 발전을 거듭하며 무신집권기에 고려의 독창적 기법인 상감법 개발 완료했답니다.

좌) 태안선에서 발견된 유물            우)12C 고려 청자 투각 칠보문 향로

옥을 깎은 게 아닐까? 진짜 도자기로 저리 섬세한 작품을 어떻게 만들 수 있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이 향로는 각각의 서로 다른 모양을 기능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조형물로 나타내었을 뿐만 아니라 음각, 양각, 투각, 철화, 상감, 첩화 등 다양한 기법이 이용된 수작이기에 국보 제95호에 지정되어 있답니다.

당대의 도자기 기술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 민족주의의 폐해라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송, 원, 명대 초반까지 중국 수준의 도자기 기술을 구현할 수 있는 나라, 구현의 수준을 넘어서서 중국인들에게 특유의 색과 양식을 인정받고 중국시장에 고가에 팔리는 수준까지 된 나라는 고려와 조선이 유일합니다. 따라서 중세의 도자기 역사를 말할 때 중국과 함께 한국이 거론됨은 사실. 임진왜란 이전까지 세계 도자기 역사에서 고려와 조선은 빠질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답니다. 그러니 중국도 우리 청자 색감은 못 만들었다 (팩트 긴 해요)라면서 우리가 최고다 라던가 일본의 도자가 전부 우리 도공들 끌고 가서 만든 거라는 (일부는 맞지만) 민족주의적 우월의식도 곤란하지만, 평가절하도 옳지 않아요. 늦어도 16세기 중후반에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세계 시장에 적극 참여한 일본, 중국과 달리, 망할 때(?)까지 쇄국 정치만 하던 우리 조상님들이 만드신 물건 중 (인삼, 종이와 함께) 몇 안 되는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특산품이니까요.

그러나 원 간섭기 이후부터 점차 소박한 분청사기로 바뀌다가 고려 말에 이르면 나라의 지원과 고려 귀족들의 주문이 끊기며 청자의 맥도 안타깝게 끊깁니다. 이것이 고려의 도자 역사인데 식기조차 만들지 못하고 손으로 음식을 먹던 유럽과 굳이 비교하자면 어느 나라의 식문화가 더 우위에 있었을까요? (사실 문화를 우위로 가리는 것은 지향할 가치는 절대 아니지만 현재 유럽 식문화의 발달을 함께 이해하기 위해서 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화장실조차 없고 목욕문화는 사탄의 쾌락이라던 유럽.

밀기울과 텃밭의 야채들로 연명하는 서민들의 삶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겠으나 우리를 미개인 취급하던 구한말 서양인들의 기록을 보면 찹찹한 마음이 듭니다.

오물 처리 시설이 없어 아무 곳에나 분뇨를 버리던 중세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 분뇨를 퇴비로 쓰며 각종 곡물로 계절에 따른  농사를 짓고 야채를 기르고 저장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체득한 나라. 태양력인 24절기와 태음력인 명절마다 술을 빚고 제철의 식재료를 이용해 다양한 음식을 만들고 문화로서 의미를 부여하여 놀이와 함께 즐기던 나라가 바로 우리 선조들의 나라입니다.

리는 습득된 정보만으로 형성된 이미지를 갖고 무언가에 대해 정의 내리거나 문제를 지적하는데 그것을 선입견이라 합니다. 프랑스라는 미식 대국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그들의 시선으로 우리가 우리를 평가하고 있지는 않은지 같이 생각하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중세 암흑기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유럽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우리 머릿속에 심어 온 것들을 객관적으로 한번 바라볼 일입니다. 식문화에 관련된 사람들이라면 더욱.




참고 자료

가스트로노미

프랑스 식도락과 문화정체성
라명순 2015 14세기 이탈리아의 요리책을 통해 본 맛에 대한 역사적 해석

한국서양중세사학회 서양중세사연구

중세의 뒷골목의 사랑

유럽 도자기 여행 (북유럽, 동유럽편)

테이블 디자인

립해양문화재연구소 블로그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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