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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hengrin Apr 09. 2024

진정한 고수는 칼을 뽑지 않는다

"칼 갈어요! 칼!"


걸쭉한 목소리가 확성기를 넘어 골목 구석구석에 애잔하게 퍼지던 소리 중 하나였다.


근래에는 들어본 적이 없다. 칼을 안 가는 것인가? 칼 갈 일이 없어졌나? 요즘은 칼을 안 갈아도 될 만큼 정교하게 칼을 만드나? 아니면 칼을 안 갈아도 될 정도로 집에서 요리를 안 한다는 것인가? 칼 갈던 장인들은 모두 직업전환을 했으려나?


이제는 칼 하면 조폭 영화에나 등장하는 사시미 회칼만이 떠오른다. 이런 제길 ㅠㅠ


칼은 어디에 있느냐로 존재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부엌에서 요리의 품격을 결정하는가 하면 무사의 손끝에서는 피의 절규가 되지만 뽑지 않고 무사의 칼집에 있는 칼이 가장 날카롭고 가장 무서운 무기가 되며 예술가의 손에 있으면 갈리테이아를 인간으로 만든 피그말리온의 도구가 된다. 은유의 세계로 들어오면 붓은 칼이 되어 촌철살인의 도구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이 칼의 칼날이 무딘 것과 날 선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쓰임새가 있을까?


도구로써 칼의 기본 기능은 자르는데(cut) 있다. 자르는 기능을 하지 못하면 칼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칼날의 예민함 정도를 말하는 무디다와 날 섰다는 것으로 그 기능의 관점이 달라짐도 엿볼 수 있다. 자르는 본연의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칼날이 예민하게 서야 함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서슬이 퍼렇수록 날이 서 있다. 색깔로도 날 섬을 볼 수 있는 정도다. 날이 섰음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을 듯 가슴이 꿍꽝거린다. 날까로 움에 대한 위협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날 섬의 반대인 무딘 칼은 어디에 쓸 것인가? 아무 쓸모도 없을까?


천만의 말씀. 진정한 고수는 날이 바짝 선 칼보다는 날이 무딘 칼을 쓴다. 


"무딘 칼로 베이면 엄청 아플 텐데? 그건 고수가 할 짓이 아닌 것 같은데 ---" 맞는 말이다. 살수의 세계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무딘 칼날이 예술의 세계에서는 다른 경지를 표현하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진정한 목수나 대장장이는 연장의 엄밀함과 세밀함에 민감해야 하지만 경지가 높을수록 예민한 연장을 무디게 해서 사용한다. 진정한 대가는 날카로움을 가지고 작품을 완벽하게 만들기보다는 살짝 무디게 만들어 관객들이 자유롭게 느낄 수 있도록 한다. 진정한 고수와 장인의 품격은 그렇게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딘 칼을 아마추어가 쓰면 졸작이 되고 대가가 쓰면 걸작이 된다. 무딘 칼을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추사 김정희가 사망하기 3-4일 전에 썼다는 봉은사 현판 글씨 '판전'의 어눌함에서 대가가 사용하는 무딘 칼의 전형을 엿볼 수 있을 듯하다. 또한 작가 주쯔칭(朱自淸)이 쓴 '아버지의 뒷모습'에서처럼 기차역을 빠져나가는 검은색 마고자와 남색 두루마기의 아버지 뒷모습의 표현을 통해 주름진 아버지의 얼굴을 표사하는 것보다 더 선명한 아버지의 형상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과 같다.


대가는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보일락 말락 관객들을 감질나게 하고, 덧붙이고 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만드는 센스로 공감을 불러들인다. 관객이 자신의 감정을 끌어 붙여 작품 속에 풍덩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대가들이 쓰는 무딘 칼이다.


무딘 칼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어설픈 아마추어가 무딘 칼을 쓰면 서걱서걱 아프게 썰릴 뿐이다. 아마추어는 무딘 칼을 쓰기보다 칼날을 날카롭게 가는 훈련이 더 필요하다. 경지와 수준의 차이를 헷갈리면 경거망동하는 망아지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망나니의 칼춤에 지나지 않는다. 나 같은 아마추어와 하수들은 항상 명심하고 조신히 칼을 가는 일에 정념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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