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이 되었다 - 정년퇴직 백서 14
10월 말이면 정년퇴직이다. 10월 한 달은 연차휴가를 냈다. 누구에게나 올 시한부 직장생활이다. 나에겐 이제 왔을 뿐이다. 場은 옮겨가는 것이지만 한 場을 끝낸다는 것에는 어떤 매듭이 필요하다. 출근을 안 하는 시간까지의 심정 그리고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을 바라보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자.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것은 긴장감일 수도 있고 여유로움으로 다가올 수 도 있다. 정년퇴직은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는 양자역학적 현상인 듯하다.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과 양자 결맞음(quantum coherence) 현상이 동시에 겉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입자만 보이고 저렇게 보면 파동만 보인다. 그러다 동시에 환희의 빛으로 작동한다. 오묘한 조화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신비의 시간을 맞이할 날이 3일밖에 남지 않았다. 가슴 떨린 경이의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가?
넘쳐나는 시간을 어떻게 놀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가? 노는데 무얼 하며 소일할 것인가 말이다. 골프 치며? 등산 가며? 기타를 다시 치며? 책을 읽으며? 네플릭스 영화를 마음껏 보며?
논다는 것의 정의는 제대로 내리고 있는가 확인해봐야 한다. 노는 게 뭔지도 모르고 논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놀다(play)'의 사전적 정의는 "1.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다. 2. 직업이나 일정히 하는 일이 없이 지내다. 3. 어떤 일을 하다가 일정한 동안을 쉬다"라는 의미다.
'정년퇴직 후 논다'라는 개념은 직업이나 일정히 하는 일 없이 지내다의 뜻을 담고 있다. 퇴직 후 논다는 문장에는 '하는 일 없이'가 방점이다. 하는 일없이 놀기에 금방 지루해지고 허무해지는 것이다. 놀 때는 '놀다'의 제1 정의처럼, 놀이나 재미있는 일을 하며 즐겁게 지내야 한다. 논다는 뜻이 갖는 궁극적 목표다. 정년퇴직자의 노는 생활은 이와 같아야 한다.
정년퇴직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선언이다. 직장의 시간에서 벗어나 오로지 자신만의 시간을 위해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직장의 시간이라는 구속과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의지만이 남아있다.
이 어쩌지 못하는 시간의 자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회사의 시간에 얽매어 자신의 시간을 누리지 못했다. 정년퇴직은 이 시간의 굴레와 속박을 제도적으로 벗어나게 해주는 시간적 해방의 공간이다. 이 시간과 공간을 누릴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허송세월하게 된다.
10월 한 달 연차휴가를 내고 퇴직 후의 시간 활용에 대한 예비 연습을 해왔다. 무엇을 하며 놀면 시간을 잘 가게 하고 우울감도 들지 않게 할 것인지를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단순히 골프약속 잡고, 피트니스센터 가서 근력을 유지하는 운동을 하고 주말이면 조깅을 나가고 길게 해외여행과 국내여행도 간간히 다니는 것들의 조합만으로는 무언가 빈틈이 있는 듯 보인다. 시간표 짜는데 허술해 보인다.
그래서 틈틈이 구성한 일상이 집의 책상을 오피스 화하는 것이다. 노트북과 태블릿은 막내 녀석이 시카고로 어학연수 가면서 가져갔다. 덕분에 신형 갤럭시북 에지를 새로 샀다. 막내 녀석 방에 있는 데스크톱 컴퓨터의 모니터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화면은 작지만 태블릿과 휴대폰도 노트북과 연결하여 회사 사무실에서 구현하던 인터넷 환경 못지않게 시스템을 갖추었다.
인터넷이 느려서, 노트북 화면 글씨가 작아서, 메일이나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안 열려서라는 핑계는 댈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인터넷 환경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OpenAI Plus애도 매월 29,900원에 가입했다. OpenAI는 chatGPT 3.0 버전이 처음 출시됐을 때 무료버전으로 가끔 사용했는데 텍스트 기반이라 그동안 크게 활용치 않았었다. 하지만 최근 OpenAI o1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폭발적인 기능 향상이 이루어졌다. 텍스트기반에서 음성인식 기반으로 확장되어 일일이 대화창에 문자를 입력할 필요도 없다. 그냥 컴퓨터와 대화하면 된다. 나는 일단 남자 비서를 선택했다. 목소리 톤은 좀 온화하고 조용하게 말하는 비서를 고용했다. 일단 며칠은 비서와 인사하고 안면 트는 시간으로 보내고 있다. 며칠 써 본 결과 목소리 인식률도 거의 완벽에 가깝다. 몇 번 생화학 전문용어의 인식이 다른 경우가 있긴 했지만 한번 반복하면 바로 수정을 해서 제대로 인식해 낸다. 대단한 기술력에 약간 소름이 돋는다.
나는 어떻게 이 OpenAI o1을 나의 비서로 쓸 것인지 공부하는데 한 두 달 정도를 투자할 계획이다. 한 달에 29,900원을 주고 비서를 고용했으니 철저히 써먹어봐야겠다. 비서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무궁무진한 방법을 알아내면 또 다른 세상을 만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주대학교 김경일 교수는 "AI는 지혜로운 사람을 더욱 지혜롭게 만들고 멍청한 사람을 더욱 멍청하게 만든다."라고 했다. AI Literacy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AI시대에는 전문성의 영역이 사라지고 빈틈을 AI가 메꾸고 있다. 모르면 모르는 거고 알면 아는 거다. 지식의 세계만큼 차별이 명확한 곳도 없다. 그 끝단에 AI가 있다. 배우는 것을 지체하거나 늦추어서는 안 된다. 앞서가지는 못하더라도 따라는 가야 한다.
고도의 전문적 기술이 필요한 것은 AI가 너무도 쉽고 빠르게 잘한다. 우리는 그 성능을 최대한 활용하여 엮어내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면 된다.
무엇을 주저하는가? 공부해야 할 것은 무궁무진하고 반드시 따라잡아야 할 AI 기술은 범인들의 상상력을 넘어서 있다. 정년퇴직 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고민할 것도 없다. AI한테 물어라. 온갖 자료를 검색하여 예상치도 못했던 밸류를 제시할 것이다. AI가 만들어내는 무작위성(randomness)을 창의성이나 새로운 생각으로 받아들일 것인지의 가치 판단을 하느냐 못하냐가가 앞으로 삶의 품위를 결정할 것이다.
정년퇴직의 시간은 그렇게 엄청난 가능성의 시간으로 열려있다. 어떻게 놀 것인가? 는 사실 정해져 있다. 하고 싶은 놀이나 일을 즐겁고 재미있게 한다는 '놀다'의 제1 개념을 지켜내는 일이다. 그것도 최신 AI 기법을 활용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