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가까워지니 벌레들이 늘었다. 학원 지하에 위치한 교무실에 앉아 아이들의 과제를 보고 있으면 커다란 파리들이나 모기들, 혹은 온점보다 작은, 정체불명의 까만 벌레들이 눈앞에 알짱거려 신경을 거스른다. 손으로 잡을라치면 어찌나 빠르게 도망가는지, 각종 살충제를 뿌려대도 유유히 피하는 모습에 약이 올라 나비를 쫓는 어린 아이들처럼 벌레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다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다.
저 미물이 언제 죽는지 보겠답시고 모기의 수명을 찾아보니 고작 2개월 남짓이라 조금은 숙연해진다. 2개월의 삶을 다 살아보려 낯선 곳에서 윙윙 날아다니며 포유류의 피를 빨려 그리도 열심이란 말인가. 고작 한 철도 다 못 찰 그 삶을 온전히 살아보겠다며 키보드에 내려앉아 내 손등으로 살금살금 다가오는 모기를 바라보다가, 내 피 몇 방울이나마 빨아먹으라고 그냥 둔 것은 모기의 짧은 생이 가여워서이기도, 생에 대한 절박함에 대한 공감을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고기를 즐기지도 않는다. 다만 먹을 기회가 있다면 마다하지 않을 뿐이다. 튀긴 닭은 갈릭, 고추장 등 각종 양념을 버무리면 천상의 맛을 낸다. 오리고기는 훈제가 제일이다. 철판에 구운 훈제오리를 상추 위에 얹어 고추와 함께 씹으면 담백한 기름이 입안을 돌며 침샘에 남아 다음날까지 나를 흔든다. 삼겹살은 또 어떤가. 싸구려 기름을 두른 불판에 고기들을 차례차례 늘어놓고, 노릇노릇 구워질 때를 노리며 애꿎은 양념장만 젓가락으로 헤집는 기다림의 쾌감.
다만 생각하는 것이다. 내 앞에 푸짐하게 차려진 이 죽은 생명은 과연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아냈는가. 내가 내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이들을 무참히 살육하고, 섭취하며, 때로는 다 먹지도 못해 남긴 살과 뼈들을 무참히 쓰레기봉지에 버릴 자격이 있는가,
중학교 시절. 맨 뒷자리에 앉아 교과서에 숨긴 만화책을 보다가 한 질문을 마주하고 큰 충격에 휩싸인 일이 있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가.
왜 사람은 다른 생명체를 향한 살육의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주인공을 해치려는 악당이 던진 이 질문은, 그 때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마음 속 진리에 파문을 일으켰다. 사람을 해치면 안 되는 건 ‘당연하다’는 주인공의 항변에, 악당의 근거가 꽤 그럴싸했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은 적은 없는가. 배가 고프지도 않으면서 맛이 궁금하다는 이유로 살아있던 생명체를 도륙하여 구운 적이 없는가. 길을 가다가 아무 이유도 없이 개미를 밟아 죽인 적은 없는가. 어릴 적 나비나 잠자리를 잡아 산채로 날개를 뜯어본 적은 없는가. 지식을 얻고자 살아있던 개구리를 잡아 배를 가르고, 네 다리를 핀셋으로 찔러본 적은 없는가. 그저 내 집을 침입했다는 이유로, 혹은 내 주거지를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살충제를 뿌려본 적은 없는가.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이므로 정당하다면, 인간보다 강한 존재가 출현함으로써 인간도 그 업보를 돌려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인공은 이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 결국 졸도해버렸다. 나 또한 한동안 혼란을 겪었다. 혼란스러움에 울부짖는 주인공에게 조력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들이 슬퍼할 테니까요.”
그러나 이 대답은 충분치 않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랑’이라는 감정이 보편적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인간은 다른 종들의 사랑을 파괴하는 살육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공포만이 나를 엄습할 뿐이다.
사람은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파괴하는가.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 ‘굷주림에서 벗어나야만 한다’는 생명 본연의 목적만이라면 이토록 괴로울 리 없다. 미식가들의 욕망에 희생당한 동물들은 이제 멸종 위기종이 되어 존속의 위기를 겪는다. 죽음조차 편안하지 않다. 이들은 거위의 목에 깔때기를 꽂는다. 원숭이의 뇌를 가른다. 오르톨랑촉새들을 어두운 곳에 가두고 눈을 뽑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르면 산 채로 술에 담가 익사시킨 후 불에 굽는다. 이들은 잔인한 요리를 즐기는 스스로의 모습이 감히 신의 분노를 사지 않도록, 요리를 먹을 땐 반드시 흰 천을 뒤집어쓴다고 한다. 생명을 범하는 죄악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욕망의 음습함이다.
추운 겨울마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멋지고 호화롭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고통 받는 동물들 또한 얼마나 많은가. 수백만원짜리 가방을 만들어내기 위해 어린 악어들은 산 채로 척추가 찢어진다. 귀한 이들이 걸칠 옷 가죽에 흠집이 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수백 마리의 양과 소들이 구타당하며 죽어간다. 상품가치가 없는 어린 새끼들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문도 모른 채 산 채로 갈린다.
그저 편하다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사용되다가 버려지는 플라스틱들이 땅으로, 바다로 스며들어가 수많은 생물들의 생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쓰레기 산을 이루는데, 인간들은 왜 이에 대한 일말의 책임조차 지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생명의 가치에 대해 꾸준히 생각해야 함은 분명하다. 생명은 대가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한 생명이 보내는 하루, 한 시간, 1분 1초는 다른 생명들의 삶을 토대로 직조되는 것이다. 내가 오늘 먹은 아침밥상에 깃들어있던 풍성하고 아름다운 생명들의 마지막. 내가 숨을 쉬고 내뱉을 때마다 명을 달리하는 이름 모를 미생물들, 내가 사용하는 수많은 도구들, 책들, 책상, 의자, 연필, 가방, 신발, 옷…. 먹고 걸치는 모든 것에 깃들어있는 그 생명의 흔적들.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산다. 이들은 모두 식물, 동물, 미생물 등으로 분류된다. 이 모든 생명들은 서로 먹고 먹히는 양육강식의 생태계를 이루며 생존한다. 먹이사실 중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들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 순환 고리 안에서 인간은 아직까지도 최상의 포식자이다. 인간이 생명의 소중함과 순환원리를 꾸준히 고찰해야 하는 이유다.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야 함은 분명하다. 인간은 생명을 길게 이어가고자 고기들과 식물들을 조각내어 섭취하고, 육식동물들은 자기들보다 약한 동물들을 물어뜯으며, 모기들마저도 다른 동물들의 피에 기생한다. 그렇게, 생명의 순환은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생명의 가치란 누가 재단하는가? 생명의 무게는 누가 측정할 수 있는가? 생명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하는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아무리 우리 인간의 기준으로 '미물'이더라도 생명 그 자체는 동등하다는 것, 그렇기에 항상 그 무게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는 '외경(畏敬)'이라는 말로 생명에의 존중을 표현했다. "나는 살려고 하는 생명들 중 살려고 노력하는 생명"이며, 내 주위는 나와 같이 살기 위해 노력하는 생명들로 채워져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생명들의 의지가 모여 이 세상은, 삶은 비로소 존재한다. 생명에 대한 예의를 항상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