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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메디오스 Feb 06. 2023

지나간 인연과 이별하는 법

2주 만에 본 은하는 그새 많이 자라있었다. 강의실 밖 탁자에 앉아 허리를 곧추세우고 책을 읽는 모양새가 제법 의젓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마지막 수업이 끝난 후 커다란 두 눈에서 눈물방울을 가득 떨어뜨리며 내 허리에 매달리던 일이 생각나, 나는 은하에게 다가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안녕, 은하야.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환히 웃으며 응답해주리라 기대했으나 이게 웬걸, 은하는 내 얼굴을 잠시 빤히 바라보더니 아무런 응답도 없이 다시 보던 책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나는 공연이 끝난 후 정적 아래 서 있다 쓸쓸히 퇴장하는 무명가수처럼, 괜히 민망해져 부리나케 강의실로 들어왔다.     


'저 녀석, 나랑 헤어지면 학원 안 다닐 것처럼 굴더니.'     


선생님이 바뀌어도 매 수업마다 나를 찾아오겠다던 다짐도 그저 떨어지는 단풍잎마냥 해가 바뀌며 날아가버릴 가벼운 마음이었던지. 나는 한동안 서운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고 휏휏 열이 오른 두 볼을 연신 부채질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며 민망도 원망도 잿가루 흔적마냥 옅어질 무렵, 수업 후 뒷정리를 하던 나를 은하의 새 담당선생님이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지 물으니 은하 이야기를 꺼냈다. 은하가 무척 대견하다는 게 요지다.     

"비유를 너무 잘하길래 어쩜 이리 잘하는지 칭찬했더니, 이전 선생님께 배워서 그렇다는 거예요. 선생님 자랑을 엄청 하더라고요."     


듣는 순간 꼭 내게 전해야겠다 마음먹었다던 선생님의 마음 씀씀이도 참 고마웠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은하에 대해 남아있던 쪼잔한 서운함이 금세 감동으로 탈바꿈해버림을 느꼈다. 아주 오래 전 떠난 학교를 방문했다 우연히 옛 학창시절의 낙서를 발견한양, 은은한 반가움이 마음속에 꽃을 피우며 속 좁은 나를 나무랐던 것이다.         


은하와 나는 더 이상 이전처럼 살갑게 서로 웃으며 마주볼 날이 없을지도 모른다. 학원이란 학생과 학부모의 사정에 따라 바로 다음날이라도 떠날 수 있는 장소라는 것, 그렇기에 나 역시 은하의 길고 길 삶 속에서 스쳐지나간 인연 1에 불과할 것임을 안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는 멀어지더라도, 나와 은하가 함께한 시간들은 두 사람의 삶 속에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 것임을 이제는 안다. 가르침이나 경험,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이를 깨닫자, 나는 한층 개운해졌다. 지나간 인연은 겸허히 보내주고 새로운 인연들을 기꺼이 맞이하며 내 삶의 새로운 조각으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간 불투명한 안개처럼 한동안 내 시야를 가리던 마음의 불편함으로부터의 해방된 것이다. 서운함이 가르쳐준 일상 속 작은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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