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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메디오스 May 04. 2023

평범한 처절함

망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족할 만한 구석이 없다. 근 한 달 간, 퇴근 후 아이를 재우고 나서도 가뜩이나 부족한 잠을 더 줄여가며 매달린 프로젝트건만, 어설프게 페인트칠한 벽처럼 초라하다. 


당장 다음날이 마감 기한인지라 더 이상 수정에 매달릴 시간도 없다. 분명 이보다 더 헌신할 수는 없으리라 여겼는데, 결과물을 노려보며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니 후회만 덕지덕지 붙는다. 그 때 스마트폰 보며 깔깔거릴 시간에 한 번 더 살펴볼 걸. 병원 진료 일정은 나중으로 미루었어도 됐는데,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치열함을 증명해야 살아남는다. 그 증표란 오직 결과물이다. 모두에게 긍정적인 충격까지 안겨줄 수는 없을지언정, 적어도 대다수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얼마만큼의 시간을 ‘희생’했는지, 내가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큰 중압감에 시달려왔는지는 아무런 증명도 되지 못한다. 손 쓸 새도 없이 수직으로 낙하해버리는 주식 그래프처럼, 오직 결과물만이 입을 가질 자격이 있다. 


어쨌거나 상관없이, 시간은 성실히 흐른다. 나는 또 다시 밥을 짓고, 아이를 깨우고, 유치원 등원길을 함께 한다. 절기상으로는 분명 완연한 봄이건만 아직도 바람은 쌀쌀하다. 팔랑팔랑 뛰어다니는 아이의 옷차림이 얇은 것 같아 마음이 시리다. 이런 것조차 나는 철저하지 못하다. 


바람개비를 보고 가자며 팔을 잡고 보채던 아이가 갑자기 단발마의 비명을 지른다. 아이 시선을 따라가니 땅에 흩어진 빵 부스러기 사이들로 개미떼들이 이리저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다


딸아이는 개미를 무서워한다. 언젠가 한 번 발을 헛딛는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 호되게 혼이 났던 계단에서도 이리 폴짝 저리 폴짝 장난치는 아이가, 개미만 보면 혼비백산한다. 그 좋아하는 미끄럼틀을 타다가도 개미가 보이면 울면서 달아난다. 작고 작은 점이 뽈뽈뽈 거리며 빠르게 돌아다니는 모양새가 아이 눈엔 괴이한 모양이다.


아이를 다독이며 방향을 틀다 무심코 돌아보니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산처럼 거대한 존재들이 가까이 걷고 있음에 겁이 나 달아날 법도 하건만 꿋꿋이 인근을 맴돈다. 가만히 보니 무언가를 하는 모양새다. 나이 들며 자연스레 녹아버린 줄만 알았던 탐구정신이 소생이라도 한듯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본다. 저마다 부스러기를 옮기는 중이다. 내 새끼손톱의 반의 반의 반의...반도 안 되는 크기의 그것들을 힘껏 옮기고 있다. 나나 딸아이가 무심코 옮기는 걸음걸음에 자신들의 몸이 씹다 버린 껌처럼 땅에 눌러 붙어버릴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들은 그저 먹이를 옮기는 데 집중한다. 나는 그것이 퍽 경이로우며, 경건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느 전쟁터 한복판에서 오직 생존 하나만을 위해 '사즉생'의 마음가짐으로 달려드는 투사들이다. 내 신발에 가로막혀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하면서도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다리로 움켜쥔 먹이만큼은 놓지 않는다. 본 적 없는 처절함에, 나는 그들이 밟히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을 뒤로 뺀다. 


생을 살아가는 것들은 모두 필사적이다. 삶을 움켜쥔 것들은 모두 위태롭다. 결과는 대개 노력과 반비례하며, 행운은 반드시 나 아닌 타인에게만 향한다. 바람의 방향을 바꿀 힘이 없기에 매순간 묵묵히 사력을 다해 부딪히며 나아가야 한다. 


일전에 뉴트리아의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한창 모피 코트가 유행할 시기, 인간들은 뉴트리아 모피를 만들고자 인위적으로 개체수를 늘렸다고 한다. 그러나 뉴트리아 모피는 이내 경쟁에 밀려 수요가 급감했으며, 자연히 뉴트리아들은 애물단지가 되었다. 상온 5도 이하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뉴트리아들을 인간들은 목장 바깥으로 내몰았으며, 생태교란종으로 지정하여 포획 포상금가지 내걸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하루아침에 버림받은 그들은, 그러나 영하의 겨울을 이겨내고 끝끝내 살아남았다. 나는 여기서 결코 꺼질 수 없는 생명의 본질을 본다. 


결국 우리는 먼 곳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하염없이 거대한 지구도 우주에서는 그저 작디작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이다. 생은 누구에게나 무겁다. 모두가 시지프스의 바위에 짓눌린다. 그러나 시지프스는 끝끝내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수 세기에 걸쳐 살아남지 않았던가. 


봄바람이 참 세다. 그러나 꽃잎들은 줄기에 매달려 투쟁한다. 바람에 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그 꽃잎들 중 하나가 나였으면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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