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라는 직업을 마음에 품으면서 나름의 직업관을 갖고 있었다. 매일 신문과 방송뉴스를 보며 그들을 동경했지만, 그 내용만큼은 동경하지 않았다.
뉴스는 끊임없이 정계의 비리나 사회적 범죄 같은 사건들을 내보내는 데 전념한다. 연쇄살인이나, 별난 행동을 일삼는 연예인의 가십거리를 파고든다. 지난 2년을 돌이켜보자. 정준영의 단톡방과 승리의 버닝썬 문제, 조국 문제 등 사람들이 주목하는 특정 이슈가 터지면 모든 미디어가 집중한다. 그 '기간' 동안은 다른 정보를 접하기가 힘들 정도다. 물론, 이러한 이슈들 역시 사회 속 문제인 만큼 보도할 가치가 충분하다. 하지만 그 쏠림이 꽤, 아니 상당히 과도하다.
이러한 쏠림은 언론 생태계에서는 꽤 당연한 듯하다. 조회수와 시청률을 통한 광고료 등 주목받는 것으로 먹고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경쟁사들과 치열하게 다투며 더 다른 것을 더 빠르게 보도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흔히들 말하는 '물 먹는 경우'가 생긴다. 경쟁에서 지는 것이다.
방송과 신문을 보다 보면 마치 나라가 망할 것만 같고, 참 각박한 사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럴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모든 내용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왜 언론은 긍정을 전파하기보다 부정을 전파할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을 '제4부'라고 일컬어 말하는 만큼 그 기능과 역할이 권력에 대한 감시가 크기에 어느정도 수긍은 간다.
그러지만 권력에 대한 감시견이 아닌 대중을 위한 안내견이 될 수는 없을까. 수 많은 언론사와 수 많은 기자가 똑같은 이슈에 몰두하는 것이 낭비처럼도 느껴졌다. 이러한 생각은 알랭 드 보통의 '뉴스의 시대'를 읽고 더 뚜렷해졌다. 알랭 드 보통은 책에서 현재의 뉴스는 상업적인 이득만을 위해, 대중의 불안과 분노를 무책임하게 양산하거나 혹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로 대중들의 클릭수만 유도하고 있다고 한탄한다. 그러면서 왜 '좋은 뉴스', '기분 좋아지는 뉴스'는 없는지를 안타까워한다.
나 역시 이에 공감한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가치관과 기자라는 직업이 만났을 때 나의 기자관 역시 그랬다. 이러한 방향성에 맞는 언론사를 탐색한 적도 있으며, 이러한 곳이 많이 생겨나기를 지금도 바라고 있다. 마음 맞는 독서스터디 사람들과 유튜브를 통해 시도하고자 했지만 잘 안돼서 아쉬움이 컸다.
언론 생태계에서 기업 및 정부 관계자, 단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혹은 일반 대중에게도 '착한 뉴스', '좋은 뉴스' 만을 다루는 곳은 어떻게 보면 지루함을 자아낼 수도 있다. 모 언론사 대표님에게도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러한 언론사나 기자는 기업 등에 호구 취급밖에 안 당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못한다고 했다. 백날 좋은 기사들 써봤자 존재감이 없고 이는 결국 돈이 안된다는 것이다. 생태계를 간접적으로라도 알았기에 그것이 무슨 말은 알겠지만서도 씁쓸했다.
내가 말한 착한 뉴스나 좋은 뉴스가 단순히 기업들을 빨아주자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최근 코로나와 관련 장애인 노동자가 경찰서에 마스크를 기부한 이야기, 최근 방영한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의 대구 코로나 의료진들의 감동적인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들이 반응을 보면 얼마나 사회를 따듯하게 하는지, 이러한 콘텐츠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장 주변 친인척으로부터 결혼 소식 등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당사자가 아닌데도 기분이 좋지 않은가. 이러한 '긍정'이 사회에 전파돼야 한다.
정보와 소식 매개체의 정점에 있는 언론 역시 그럴 필요가 있지 않을까. 1시간 방송 분량에서 사건, 사고로만 40분을 넘게 채우는 것은 사회부 기자들은 물론 시청자들의 정신건강에 너무 해롭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