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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Apr 05. 2024

#3. 환불 손님

    환불 사유는 다양하다. 단순 변심, 상품 불량, 가격 착오 등등. 사유마다 손님의 태도도 다르다. 상품에 문제가 있어서 온 분들은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망설임 없이 바로 본론을 꺼내고, 단순 변심으로 온 분들은 조심스럽게 입을 떼며 한결 사근사근 말씀하신다. 놀이공원 기념품점에서 일할 때는 주로 상품 불량으로 반품 요청을 받았는데, 사실 그중 절반은 속 보이는 거짓말이란 걸 직원 모두가 알았다.


    예를 들어 놀이공원에 입장할 때 머리띠를 사서 실컷 쓰고 다닌 다음 집에 돌아갈 때 봉제가 잘못 되었다고 반품하는 식이다. 또는 아이가 장난감을 험하게 가지고 놀다가 한쪽이 부서지거나 작동이 안 되면 살 때부터 이랬다는 핑계도 흔했다. 하지만 아무리 의심이 되어도 웬만하면 반품을 받아주라고 교육을 받아서 손님에게 따진 적은 없었다. 딱 한 번만 빼고.


    하루는 중씰한 손님이 상품이 불량이라며 속상한 얼굴로 쇼핑백에서 뭔가를 꺼냈다. 폴리에스터와 스판이 섞인 겉감 안에 비즈가 든 목쿠션이었는데 그걸 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재질이 같은 삼 년 된 내 잠옷 바지보다 색이 바랜데다가 비즈가 빈약해서 탄력이라곤 하나도 없고 형태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은 뻔뻔하게도 살 때부터 이 상태였다며 환불해달라고 우겼다.


    나는 속으로 '살 때부터 이 상태면 왜 사셨어요?'라고 되묻고 싶은 걸 꾹 참고 상품을 세탁한 적이 없는지 확인했다. 손님은 그런 적 없다고 딱 잡아떼며 빨리 환불이나 해달라고 닦달했다. 세탁도 안 한 비즈 쿠션이 도대체 왜 이렇게 흐물흐물하단 말인가. 적당히 우겨야 직원도 모른 척 눈감해주지 이건 눈 가리고 아웅할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영수증을 달라고 해도 안 받았다, 그럼 언제쯤 사갔는지 알려달라 했더니 기억이 안 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내가 에둘러 환불을 거절하자 손님은 담당자를 불러오라고 소리쳤다. 몰염치가 괘씸해서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손님의 이목을 끌어봤자 좋을 게 없었기에 나는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고 사무실에 계신 점장님께 사정을 설명했다. 점장님은 내 하소연을 다 듣고 여유 있는 미소를 짓더니 손님을 만나러 갔다. 손님은 점장님 앞에서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고 점장님은 손님의 말을 경청한 뒤 환불 요청을 받아들였다.


    손님이 돌아간 뒤 점장님에게 물었다.

"저거 진짜 여기서 파는 거 맞아요? 일 년 넘게 일하면서 본 적이 없는데요."

"저거 사오 년 전에 단종된 상품이야."

"근데 환불이 되는 거예요?"

점장님은 별다른 설명 없이 씩 웃으며 내 어깨를 두어 번 토닥거렸다.

"수고했어."

아무리 이미지가 중요한 대기업이라고 해도 이런 것도 서비스 정신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직원 선에서 안 된다고 했는데 윗사람이 나와서 요구를 들어주면 직원을 깔보는 손님의 못난 시선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아닌가. 지금이야 점장님의 처사가 옳다는 걸 이해하지만 혈기 넘치고 정의감에 불타오르던 그 때에는 결론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계산원으로서 경력을 쌓아가며 무리하게 요구하는 손님들을 너그러이 바라보려고 연습했더니 지금은 그 손님들이 밉기보다 안쓰럽다. 창피도 잊고 양심도 버리고 자기 요구만 관철시키는 사람이라면 인간관계야 불 보듯 뻔할 테니까. 무엇보다 솔직한 말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준대도 내가 손해볼 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어차피 회사 돈에서 비용 처리하는데 괜히 열내서 속병을 얻는 것도 미련하다. 회사의 방침이라면 기꺼이 환불해 드리고 길게 상대하지 않는 게 마음의 평화를 얻는 지름길이더라. 손님이 반말에 막말을 쏟아낼 때 계산대 안쪽에 서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의를 유지하며 끝까지 상대를 존중해야 하는 의무가 억울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두 공간을 가르는 계산대가 장애물이 아니라 방어막으로 보인다. 저 사람이 내뱉는 말은 내가 아니라 가상의 계산원을 향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말을 듣든 내 인격이 모욕당할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상황을 지켜보면 거친 말로 맞서기보다는 끝끝내 존댓말로 내 마음의 사적인 영역을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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