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용 아기 신발 팝니다.
(For Sale : Baby Shoes, Never Worn)
어떤 소설 강좌에서 세상에서 가장 짧은 소설을 배운 적이 있다. 헤밍웨이가 쓴 문장인데 영어로 단 여섯 단어이다. 역시 대문호는 다르다. 젠장. 분명 소설가라는 직함이 탐나서 수강한 강좌였는데 수업을 거듭할수록 ‘나 소설에 싹수가 노랗구나?’를 여실히 느껴 창작 의욕이 기하급수적으로 뚝뚝 떨어졌다. 돈이 아까워 끝까지 수강한 뒤 얻은 것은 ‘사실 그렇게까지 소설이 좋았던 건 아니었군.’하는 내면 직시와 ‘나도 한 때 소설가를 꿈꿨지.’하고 남 앞에서 떨 수 있는 허세. 나쁘지 않은 소득이다.
이런 식으로 남이 잘나가는 게 부러워서, 어쩌면 일이 쉬워 보여서 멋모르고 덤볐다가 한방에 나가떨어진 경험이 1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촘촘히 박혀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십자수. 연인 사이에 가장 받기 싫은 선물로 종이학과 쌍벽을 이루는 십자수에 왜 돈백만 원을 들이부었냐고? 바로 우리말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내겐 섣불리 남 앞에서 말하기 힘든 취미가 있는데 바로 무작위로 국어사전을 들추며 내가 모르는 낱말을 찾는 것이다. 그것도 고유어만. 고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이 학구적인 취미는 혹시 책벌레로 보일까 봐 한 번도 내입으로 밝힌 적이 없다. 정말이다. 이런 샌님 같은 취미가 있다고 날 책벌레로 오인하면 곤란하다. 내 일 년 독서량은 대한민국 평균 수치를 매해 착실히 끌어내리고 있다.
어쨌든 순우리말 사전을 비롯하여 고유어를 다룬 책은 한 번씩 다 읽어봤을 정도로 고유어에 애착이 강했는데 이게 알면 알수록 안타까워 속이 끓었다. 사실상 많은 고유어가 사어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 알았다. 물을 아끼는 것과 달리 아름다운 말은 아낄수록 써야 한다는 걸.
자, 그렇다면 내가 하루에 ‘늘쩡거리다’라는 말을 백 번 쓰면 이 말의 생명력이 강해지는가? 아니다. 백 사람이 한 번씩 쓰면 모를까 혼자서는 아무 약효가 없다. 여기였다. 내 사명감이 불타오르기 시작한 곳이. 지금 생각해보면 내 꾀에 내가 속아 넘어간 것 같다. ‘~하면 모를까’ 이런 식의 문장구조는 사명감이 싹트기 딱 좋은 여건이다. 그다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이렇다. ‘아무도 그렇게 안 할 텐데 그럼 나라도 해야지. 나까지 안 하면……, 안 돼! 소중한 고유어가 모두 몰살당하고 말 거야! 그럼 우리말이 피폐해질 테고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의 주인의식이 점점 희미해질 테고 외래어가 점점 우리말을 잠식해나갈 테고 그럼 식민지 시대가 또 도래할지도……!’(그, 그만!)
그렇게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청춘의 연료를 여기 탈탈 털어 고유어 홍보대사를 자처했다.(백수라서 시간이 너무 많았나보다.) 하지만 십 리도 못 가 냉정한 현실의 벽에 부딪쳤으니 아무도 고유어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열정적으로 포스팅을 하면 사람들이 ‘어머낫! 이런 귀엽고 깜찍한 우리말이 있었다니!’하고 미친 듯이 공유를 해나갈 줄 알았건만 온종일 매달려 게시글을 올려도 조회수는 고집스럽게도 한 자릿수를 벗어나지 않았다.
허탈함이 한바탕 휘몰아친 뒤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뒤늦은 자각이 찾아왔다. 나는 세상에게 느낀 배신감을 망토처럼 휘두르고 비장한 눈빛으로 온갖 연관검색어를 붙여 검색에 매달렸고 그중 한글 십자수 도안이 내 마음 속 과녁에 명중했다.
‘이거다!’ (이거 아니야…….)
그렇게 또 한 번 열정이 발화, 아니 방화를 당했다. 십자수라고는 초등학생 때 친구한테 “이게 안 돼?”라는 소리를 들어가며 배운 게 다인데 아름다운 우리말을 아름답게 십자수로 알리자는 희망찬 다짐이 냉정하게 현실성을 따져보기도 전에 마음을 점령해버렸다. 호기롭게 돌진을 외치고 얼굴을 들이민 곳은 아이디어스.
‘저 입점할게요!’
‘돌아가세요.’
나를 죽이지 못한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할 뿐이다. 니체가 그랬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난 그냥 점점 더 흐물흐물해지던데. 상처를 입은 사람 어디 없나 찾는다면 바로 여기요. 어쨌든 한 번 만에 포기하면 난 그냥 한 방짜리 사람밖에 안 되니까 또 도전했다. 남들보다 상품성은 떨어져도 자꾸 시도하면 검토하기 귀찮아서 붙여주지 않을까 제멋대로 희망 회로를 돌렸다.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포트폴리오에 날 떨어뜨리면 우리말 파괴자, 최소한 우리말 파괴 방관자라는 은근한 압박을 연하게 타 넣었는데 그걸 심사하는 사람이 원샷한 모양이다.
Idea
십자수의 씨줄과 날줄은 한글의 기하학 형상을
표현하기 좋은 최적의 도화지였습니다.
도형처럼 보이는 한글의 생김새,
우리말의 운율감,
자음과 모음의 과학적인 조합 방식,
가로와 세로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유연성,
십자수는 이 모든 한글의 매력을
알록달록한 색실로 극대화해 주었습니다.
Identity
글과 말에는 생각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좋은 말을 가까이 두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기분은 달라집니다.
여러분이 언뜻언뜻 ‘한글 십자수’ 작품에
눈길을 줄 때마다 기분이 새로워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른
순우리말 중 뜻과 소리, 모두 매력적인
순우리말을 엄선하고 있습니다.
Ideal
안타깝게도 우리말과 관련하여
잘못 알려진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자어라서
한국어에서 순우리말보다
한자어의 영향력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사전을 찾아보면
한자어 중에선 실용성이 무척 떨어지는
낱말들이 많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어 사전’을 만들며
토박이말보다 한자어를 압도적으로 많이 실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박자감과 생동감이 넘치는
고유어야말로 우리의 마음을 더 정확히
표현해주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고유어가 더 널리 쓰여서
더는 낯선 말이 되지 않길 바랍니다.
(아이디어스 프로필 발췌)
그렇게 당당하게 작가 이름을 달고 혹시나 품절 사태가 일어날까 봐 실을 필요 이상으로 쟁여두고 대박을 기다린 결과, 판매 건수는 1건. 그리고 찾는 이가 없어 무기한 판매 중지. 그리고 아래는 내 생에 유일한 고객이 남긴 후기 중 일부.
이거어떻하죠너무이뻐요
작가님~사랑합니다♡♡
이렇게이쁜걸만들어주시다니
이만 천 원을 벌자고 백만 원 이상을 썼다. 나란 사람, 손재주만 없는 줄 알았더니 경제관념도 없었구나. 이렇게 또 나를 알아간다. 알면 알수록 별로다. 거리 두고 싶은 사람이다. ‘실패를 풀어 성공을 수놓다’ 언젠가 표어 공모전에서 내가 낸 문구이다. 십자수에 데인 경험으로 이런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나 싶다. 실을 감아놓는 도구인 실패와 일을 그르친다는 실패의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비장의 무기였는데 성공을 수놓지 못하고 입상에 실패했다.
손길 한 번 닿지 않은 최고급 십자수 실을 한 무더기 보고 있자니 한숨만 나왔다. 도와줘요, 당근!
미사용 십자수 실 나눔합니다.
(Giveaway : Cross-stitch Thread, Never Used)
이 안에 얼마나 많은 애환과 실망이 깃들었는지 사람들은 알까. 근데 파는 게 아니라 나눔이라고 쓰니까 헤밍웨이 글보다 훨씬 덜 슬퍼진다. (지금 생각하면 왜 안 팔고 그냥 줬는지 모르겠다. 너 부자니?) 그나저나 ‘나눔합니다’는 어딘가 어색하지 않나? ‘나누다’라는 동사를 ‘나눔’이라는 명사형으로 바꾸었다가 다시 ‘하다’라는 동사를 붙여도 되는 걸까? 그냥 ‘나눕니다’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잠깐, 난 왜 이런 걸 따지고 있지?
약속한 초등학교 앞에서 기다리니 중년 여성분이 곰살맞게 다가오신다. 그냥 받기 미안하다면서 데리버거와 소분된 과자가 담긴 위생 비닐을 건넨다. 햄버거를 싫어하지만 감사하게 받고 집으로 왔다. 또 챗이 왔다. 가져가서 내용물을 확인해보니 생각보다 실이 훨씬 많다며 스타벅스 아메리카노 쿠폰도 받으란다. 커피를 못 먹지만 또 감사히 받았다.
소유물의 수명이 꼭 내 손에서 끝나란 법은 없다. 나처럼 끈기가 찹쌀보다 멥쌀에 가깝고 심지가 소나무보다 수수깡에 가까운 사람은 정말 괜찮은 상품을 자주 당근에 내놓는다.(정말이다. 얼마 전에도 캘리그라피 세트를 거의 70% 세일해서 내놓았다. 다들 득템하시라.) 내 손을 떠나간, 생업으로 삼고 싶었던 물건들아, 취미로 삼고 싶었던 물건들아, 새 주인은 맘에 드니? 응? 나 누구냐고?
*사족: 이 글을 쓰는 순간 얄궂게도 아이디어스에서 메일이 왔다. 메일 제목은 ‘연속 3회 서버이용료 미납으로 인한 작가 자격 종료 안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