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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현 Jun 24. 2020

잠시 멈춰도 괜찮다. 포기하지 마라.

끝은 언젠가 오기 마련,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이라면 취업을 하나로 들 수 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첫 모의고사에서 언어영역 점수가 너무나도 높게 나와서 막연히 선생님이 되어야지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단숨에 진로를 결정지었다. 결정이 쉬웠다고 해서 간절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노력이 부족했을 뿐. 대학을 졸업하고 볼 수 있는 임용시험에서 4번의 불합격을 겪었다. 매 시험 아까운 점수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도전했던 것은, 나는 하면 될 거라는 근본 없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 자신감은 바로 어머니에게서 나온 것이다.

  끝없는 믿음으로 지원해 주시고, 1차만 합격하면 2,3차(처음 시험을 보기 시작했을 때는 시험이 3차까지 진행되었다.)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합격할 것 같다는 믿음의 응원을 보내주셨다.(어머니의 자신감도 어디서 나온 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시험과는 인연이 없었다. 커트라인에서 1점 정도 차이나는 것은 아깝지도 않았다.

  한 번, 두 번.. 떨어질 수록 시험칠 때 긴장을 잘 하지 않던 나는 긴장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어머니는 긴장을 하지 않으시는 듯 했다. 자식이 나이는 먹어가고 공부는 계속하는데 시험에는 안된다.. 나라면 차라리 다른 것을 알아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라도 해보겠지만, 전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말씀도 없으셨다. 네가 선택한 길이니 합격은 하고 끝을 내라는 말씀뿐,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세 번째 시험을 치르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는 거실 쇼파에 누워 일어나 보지도 않으시다가 갔다 오겠다는 인사에 고개를 들어 인사를 보내시고는 다시 누워버리셨다. 서운해 할 새도 없이 시험은 끝이 났고 집에 돌아와 채점을 하는데 옆에 오셔서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셨다. 시험을 친 이래로 최악의 점수를 받았다. 살짝 과장을 해서 ‘조금’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 드렸더니, 그럴 줄 알았다고 하신다.

  “오늘은 이상하게 시험치러 가는 것 같지 않고, 시험에도 안될 것 같더라.”는 말씀과 함께.

  덕분에 다시 한 번 큰 부담 없이 시험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도 해보고 산 속 고시원에도 들어갔다 왔고, 결국 2013년 서울 노량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큰 의미가 있겠나 싶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곳인데, 아버지께서 어디서 듣고 오셨는지 거기에 갔다온 사람들이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많더라며 권유하셨고 죄송한 마음을 뒤로 하고 마지막 준비를 하게 되었다.

  또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20대의 마지막에 치르게 된 시험은 큰 변화가 생겼다. 3차까지 있던 시험이 2차로 줄어들었고, 대신 객관식이던 1차 시험이 서술형 시험으로 바뀌었다. 객관식 시험을 치다 보면 항상 겪게 되는 고민, 정답 같은 두 개의 답 중에 하나 고르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나 큰 고통이었고 그런 문제는 항상 틀려왔다. 학교 내신 시험과 수능 시험, 심지어 운전면허 시험에서도. 객관식 시험에 약하던 나에게는 좋은 소식이었고, 아는 것만 쓰면 된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 노량진은 공부하기에도, 놀기에도 참 좋은 곳이었다. 장수생의 노련미로 초반에 서울 구경도 좀 하고 놀기도 하다 날이 더워질 무렵, 강의를 듣던 학원에서 친 모의고사에서 충격을 받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때부터 5개월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고 초조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시험이 다가올수록 긴장되는 마음에 불안함이 더해졌다.

  시험 전 날, 시험장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왔는데 이상하게 소화가 안되더니 하루 종일 뱃 속의 모든 것을 아래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먹은 것도 없는데 고장난 수도 꼭지 처럼 5분에 한번씩 화장실로 달려가야만 했다. 심지어 집 근처 약국에도 갈 수가 없어 아버지께서 지사제를 사다주셨고 먹은 보람도 없이 화장실을 들락날락했다. 시험날이 밝았지만 설사병은 멈출줄 몰랐다. 짜증이 몰려왔다. 어쩐지 배가 자주 아프던 나에게 네 번의 시험동안 한번도 이런 일이 없더라니, 중요한 순간에 그러려고 했구나.. 라는 대상없는 원망을 했다.

  시험장에 도착해서 한 번, 입실 시간이 다 되어서 한 번 화장실에 다녀왔지만 시험 보는 내내 배가 아팠다. 1교시 교육학 논술이 시작되고,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또 가야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날따라 생각나는 답이 너무 많았다.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어서 한 줄만 더, 한 줄만 더 하다보니 시험 시간이 끝나버렸다. 종이 치고 답안지를 걷어가자마자 달렸다. 2교시 전공 시험이 시작되기 전 한 번 더 화장실에 다녀온 나는 지옥을 맛보았다. 이번엔 정말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단답형과 짧은 서술형 문제에 답을 달다보니 계속 아는 것만 나왔고, 정신없이 하나만 더 쓰고 나가야겠다는 다짐을 수 없이 하다보니 시간이 끝났다. 인간의 괄약근은 대단한 힘을 가졌음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이상하게도 답이 정답을 쓰는 공간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닌가. 3교시도 마찬가지였다. 나가자, 한 줄만 더 쓰자로 갈등하다보니 시험이 끝나버렸고 빈 칸, 빈 줄 하나 없이 답안지를 채우고는 화장실로 뛰었다. 단 한 순간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머리와 괄약근이 싸우며 시험이 끝났고, 주변 분위기를 보니 다들 생각했던 것 보다 쉬웠던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이 정신에 답을 그정도 적었으면 남들은 다 잘 봤겠지..’

하는 생각이 이번에도 틀렸구나, 정말 이 시험은 나에게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 같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었다.

  이제는 부모님께 더이상 손벌릴 수 없을 것 같아, 마음 속으로는 다른 일자리를 알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시간을 벌기 위해 2차 준비를 핑계삼아 노량진으로 다시 올라왔다. 오랜 수험 생활로 망가진 몸을 회복하려 운동을 하며, 습관적으로 전공 책들을 조금씩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1차 발표날이 되고, 확인을 위해 홈페이지에 접속한 나는 익숙한 수험번호를 마주하게 되었고, 너무도 서럽게 울었다. 이러려고 그날 그렇게 설사병으로 고생했나 싶기도 하면서, 그게 아니었더라면 수석이었을텐데.. 라는 근거 없는 상상을 하며 2차 시험을 보았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던대로 2차는 수월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 1차 발표 때 서럽게 흘린 눈물 때문이었을까. 최종발표 때는 별 감정이 생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별 내색하지 않고 수험생활을 기다려주신 어머니께서는 참 많이 힘들었다며, 그래도 언젠가 될 줄 알았다며 참았던 고생을 털어놓으셨다. 포기하지 않고 달려온 결과가 결국에는 끝을 만나게 되었다. 온 가족이 몸과 마음을 다해 매달린 수험생활, 취업전선에서 살아 남은 결과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주저 앉았지만 다시 일어나 달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참아 내었던 부모님의 힘이 아니었을까?

  이제는 로또가 되면 일을 그만 두겠다는 다짐을 농담처럼 하고는 매주 로또를 사지는 않는 7년차가 되었지만, 앞으로 또 다른 길을 택하게 되면 나 자신을 믿고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들을 믿으며 포기하지 않고 걸어갈 것이다. 끝은 언젠가 오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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