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건물 내 소음 관련 민원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입주자 간 작은 배려가 필요합니다. 우리 집 바닥은 아랫집의 천장이라 생각하시고 가능한 조용히 걸어야 합니다. 또한, 알람(진동 및 소리 작게) 설정하여 타 세대에게 불편을 끼치지 말아 주세요. 특히 늦은 시간에는 소음 발생에 더욱 주의하여야 합니다. 우리 모두 본인과 이웃을 위해 노력해 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 오피스텔에 산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건물 관리인에게 이런 문자를 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 분명 단체 문자인데... 어쩌면 나에게만 콕 집어 보낸 문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떳떳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전날 밤, 급하게 한 이불 빨래. 그게 마음에 걸렸다.
밤 9시경, 정체불명의 이불 얼룩을 발견했다. 그다지 큰 크기의 얼룩은 아니었으므로 빨래보다는 제품을 쓰면 감쪽같이 지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만 급하게 서두르다가 용액을 통째로 들이붓고 말았다. 뚜껑이 아니라 용액 마개까지 열어 버린 것이다.
원래 얼룩 크기보다 몇 배로 더 크게 젖어버린 이불을 보며 빨래를 지금 할까, 내일 할까 잠시 고민했다. 얼마 전에 세탁기를 바꿨는데 전에 쓰던 것에 비해 신형인데도 어찌나 일하는 티를 내는지. 작동 소리가 유난히 큰 것 같았다. 그렇게 한 번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소리는 갈수록 더 크게만 들렸다. 내가 그 소리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옆집에서 들려온 세탁기 소리 때문이었다.
‘아, 우리 집 아이(!)만 유난스러운 건 아니었구나’
하룻밤을 그냥 두는 게 영 내키지 않아 쾌속 모드로 세탁기를 돌렸다. 9시 30분? 늦어도 10시 무렵에는 세탁이 끝났던 걸로 기억한다. 분명 이른 시간이라고 할 순 없지만 아예 양해받지 못할 시간도 아닐 것 같기도 한데...
다시 문자를 꼼꼼히 읽어본다. 나 때문에 들어온 항의였다면 늦은 밤 세탁기를 돌리지 말아 달라는 말이 있어야 하지 않나? 여러 예시 중에도 세탁기와 관련된 말은 없으니, 내가 아닐 거야. 아니겠... 지? 그렇게 믿고 싶어 진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은 되도록 되고 싶지 않아서.
만약 내가 아니라면, 어쩌면 그 남자 때문일지도 몰랐다. 내가 세탁기를 돌린 다음 날 새벽 2-3시쯤, 복도에서 누군가와 카톡과 전화를 동시에 주고받던 그 남자.
그 밤, 복도의 공허함을 타고 더욱 크게 진동한 ‘카톡’ 알림음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남자의 행동은 여러 모로 미스터리했다. 전해 듣기로 대부분이 1인 가구인 이 건물에서 그 시간에 굳이 집 밖에서 전화를 받는다는 것은 혼자 살지 않거나 아니면 지금은 누군가와 함께 있기 때문일 터. 조용히(?) 전화를 받아야 해서 밖으로 나왔으면서도 카톡을 진동이 아닌 소리로 해놓은 건 도대체 무슨 심리람?! 이렇게 연속적으로 '카톡 카톡 카톡' 울려 대는 데도 말이다. 그것도 이렇게 야심한 시간에. 심지어 통화 중에도 계속.
다 차치하더라도 통화 분위기가 너무 의뭉스러웠다. 상대방과 대화 중간중간 웃기도 하는 걸로 봐서는 긴급 전화는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밀애 느낌의 통화에 가까웠다.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너무 잘 들렸기 때문에 나는 엿들은 내용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머릿속으로 써 가기 시작했다. 그 상상이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효과가 되어주길 기대하면서.
그의 집에는 여자 친구가 잠들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뺏겼다. 그녀에게 오는 연락을 무시하거나, 내일 통화하자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상대방에게 마음이 가 있는 상태여서 자신이 어떤 무례를 범하고 있는지 전혀 안중에 없다. 당연히 이웃들의 숙면을 방해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채 아니, 무시한 채 둘만의 썸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들어 간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누군가 그들의 세계에 끼어들고 싶어 한다. 바로 계속 카톡을 보내는 사람. 그는 누구지? 설마 잠에서 깬 그의 여자 친구?
말도 안 되는 추리를 멈추고 잠을 자고 싶은 찰나 남자의 통화가 끝났다... 고 생각한 것은 나의 오산. 하...... 집으로 들어간 지 5분 후쯤 그는 다시 나와 통화를 계속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몇 해 전에도 다른 장르(!)의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날도 새벽 2-3시쯤이었는데, 쿵하고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잠시 후 뭔가 와르르 던져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바로 남녀가 싸우는 소리로 이어졌다. 단지 연인 간의 사랑싸움이라고 여기기에는 소리가 다소 날카롭게 들렸다.
혹시 데이트 폭력 같은 건가?신고를 하자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닐 수도 있잖아? 맞아. 아닐 수도 있지. 지금은 쌍방이 그냥 말다툼 중인 것 같으니 조금만 더 두고 보다가 위험한 것 같으면 주저 말고 신고를 하는 거야.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걸 수도 있잖아? 그럼 어떡해. 지금 해야 하나? 나는 그들처럼 내 안의 나와 수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볼 수는 없는데, 들리기만 하는 소리. 당사자는 왜 그런 소리가 나는지, 그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아닌지 알고 있지만 일방적으로 소리만 듣고 있어야 하는 사람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저 추리하고 상상할 뿐이다. 정체불명의 소리에 어떤 대응도 하지 못하자 나는 점점 더 무력해져 갔다. 혹여나 나의 지금 이 망설임이 비극을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 생각을 품게 된 순간, 무섭기까지 했다.
정확한 사태 파악을 위해 조용한 것은 두 사람이 아닌 나였다. 얼마나 숨죽였을까. 한 5분 남짓?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두 사람의 휴전일까, 한쪽의 일방적인 패배일까. 볼 수 없는 나로서는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제발, 비극이 아니기를... 불안한 밤이 잠들고 있었다.
며칠 후. 외출에서 돌아왔더니 현관에 무언가 놓여있다. 귤과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이었다.
‘안녕하세요. 605호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 소음 때문에 불편하셨을 부분에 대해서 사과드리려고요. 바로 여행을 갔다 와서 이제야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소분한 귤을 보아하니 아마도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온 것이리라. 다음 날 두 사람의 목적지가 경찰서가 아닌 제주도였다고 생각하니 그날 밤 혹시나 비극일까, 불안에 떨던 내 모습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뭐, 그래도 괜찮았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대로 새드엔딩이 아닌 해피엔딩인 거니까.
나일까, 그일까. 다시 문자를 읽었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그에게 해당 사항이 더 많아 보였다. 나 역시 계속 조심하며 살겠지만 그도 정신 차렸으면 좋겠다.
'저기요, 제발 예의 있게 삽시다. 남에 사람에게든, 사랑하는 사람에게든 요. 아, 물론 둘 다 해주면 더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