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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노래 2

by 안개인듯

분명히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에 걸린 게 틀림없었다. 별다른 증상도 없이 몸살이 좀 오는가 싶더니 열이 나기 시작했다. 타이레놀을 먹으면 열이 떨어졌다가 시간이 지나면 마찬가지였다. 다시 약을 먹고 누우면 땀에 젖어서 깨어나곤 했다. 그렇게 밤새 뒤척이다 물을 마시러 정수기가 있는 식탁으로 갔다.


새벽빛이 부옇게 퍼지고 있었고 희미한 유리창을 통해 삼십여 년 전 이국땅의 낯익은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꿈처럼 여준과 살던 집에 나는 들어가 있었다. 너무도 젊었던 한 시점의 쌍둥이 자매가.

“언니. 시내 한 번 나가자.”

여준이 나를 불렀다. 웬만해서는 나를 언니라고 부르지 않는 아이인데 별일이었다.

“이 밤에? 위험하지 않아?”

파리에서의 생활이 이제 한 달 정도밖에 안 된 나는 모든 게 낯설고 두려웠다. 더욱이 나와 여준이 사는 곳은 시내 중심지와는 떨어져 있는 언덕 위의 셋집이었다. 그나마 남편이 마련해 준 쌈짓돈이 있어서 생활비는 내가 해결했지만 장을 보려면 자전거를 타고 나가야 했다. 그 모든 것이 서툴고 불편해서 나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근처 대학에서 하는 한 학기 크로키 클래스만 겨우 듣는 정도였다.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어. 내 남친 보여줄게.”

서울에서부터 함께 온 남자와 진즉에 헤어진 것은 알고 있었으니 그 사람은 아닐 것이고 이곳에서 만난 남자가 분명했다. 여준은 한인교회에 있는 유학생 커뮤니티에서도 교제가 활발했기에 어쩌면 내가 아는 얼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여준이 자신의 남자를 소개하겠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약간 흥분되었다.

“그래서 언니라고 했구나. 별꼴이라고 생각했어. 하던 대로 해라.”

내 말에는 대꾸도 않고 여준은 내게 옷을 골라 줬다. 옷이라고 해야 여준이나 나나 변변치 않았지만 나에 비해 여준은 패션에 감각이 있었다.

“언니가 예쁜 게 좋지. 나도.”

여준은 무슨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자신도 옷을 챙겨 입었다.


“글쎄, 우리를 구별할 수 있을까 몰라. 여기 애들이 동양인은 거의 구별을 못하잖아. 그런데 쌍둥이를 구별해 낼까?”

그러더니 눈을 반짝이며 장난치듯 말했다.

“똑같은 옷이 있으면 똑같이 입고 나가면 재밌겠는데. 아쉽다. 아마 도플갱어라고 생각할 거야. 놀란 눈을 생각만 해도 재밌어.”

영문도 모른 채 여준에게 이끌려 한참을 걷고 잠깐 택시를 타고 간 곳이 리방(Liban)이란 술집이었다.


“야, 나 술 못 먹는 거 몰라? 무슨 술집이래?”

그렇잖아도 주눅 들어 손을 내젓는 나를 붙잡아 여준은 깍지를 꼈다.

“촌스럽긴. 술집이 아니라 바야. 아니 카페라고 해야 하나? 노래하고 연주하고, 술은 그저 디저트라고 보면 돼.”

여준은 어두운 실내를 거침없이 들어가 나를 한 테이블에 앉히고 칵테일을 주문했다. 어리벙벙한 나는 이끄는 대로 주저앉아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두운 조명이긴 했으나 눈에 익으니 다 알아볼만했다. 길고 넓은 두어 개의 테이블과 작고 앙증맞은 테이블이 군데군데 있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공기는 탁했다.

기타부터 색소폰, 첼로까지 몇 개의 악기가 연주되었고 밴드 공연도 볼만했다. 끄트머리에 노래를 하는 사람 두엇이 재즈를 했고 마지막엔 클래식 성악곡이었다.

그때 난 처음 남자의 소프라노 소리를 들었는데 그 기억은 너무도 강렬했다.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높고 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른 사람은 누가 봐도 남자였다.

관객들 사이에서 앵콜이 쏟아졌고 꽃이 던져지기도 했다. 앵콜 곡으로 부른 것이 아마도 ‘돌아오라 소렌토로’ 였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외국 곡이었다.

“트랜스젠더야? 여성이 남성으로 전환했니? 그런데 소리가 기가 막히다. 왜 굳이 자기 성을 바꿨을까?”

옆구리를 쿡 찌르며 한 질문에 여준은 소리 죽여 웃었다.


“가만있어 봐. 얘기해 줄게.”

여준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남자의 무대인사 소리가 들렸다. 인사말은 내가 겨우 알아듣는 수준의 프랑스 말이었는데 분명 남자의 목소리였다.

도대체 이 나라는 뭔가 뒤죽박죽이야.

공연히 남의 나라를 타박하는 나를 보며 여준이 비죽비죽 웃었다.


“쟤야. 내 보이프렌드. 하산. 레바논 사람이지. 아니 난민인가? 하여간 끝내주지? 나도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카운터테너를 말만 들었지 처음이거든. 그런데 확실히 남자야. 노래할 때만 그래. 내가 소개해 줄게.”

여준의 이야기는 너무 예상 밖이어서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기쁨에 가득 찬 여준의 옆얼굴만 바라보았다. 너무나 낯선 내 쌍둥이 동생 여준.

공연이 끝난 남자가 무대에서 곧바로 여준에게 내려왔다. 여준은 일어서서 맞아 키스를 하곤 나를 소개했다. 어색하고 불명확한 영어로 서로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이후의 모든 말은 여준이 통역했다. 둘은 프랑스어와 생경한 외국어를 섞어가며 이야기했는데 나를 위해 가끔 영어를 사용했다. 불편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그냥 견디어 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여준의 남자와 나는 그렇게 딱 한 번 만났다.

여준은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다시 나갔는데 새벽 2시가 지나있었다. 그러니 남자에 대해 물어볼 어떤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그럴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난 피곤했다.


내가 다시 여준을 본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저녁 무렵이었다. 여준은 소식 없이 하루 이틀을 지내고 돌아오는 일이 있었지만 이번엔 길었다. 연락할 방도도 없이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다 저녁 산책을 나가려는데 문 앞에 쭈그리고 있던 여준을 발견했다. 놀란 나는 여준을 집으로 끌어들여 자초지종을 물었다.

“언니, 지난밤 공연이 판타스틱이었어. 언니도 봤어야 했는데.”

여준에게서 발효된 알코올의 고약한 냄새가 났다. 어디서 얼마나 마시고 왔는지 묻기 전에 좀 씻겨서 재워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지쳐 보였다. 여준은 그 저녁부터 다음날 저녁까지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잠든 여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나는 움푹 꺼진 눈두덩과 건조하게 벗겨진 입술이 눈에 들어와 화들짝 놀랐다.

왜 이렇게 야위었지? 일주일 만에?

안쓰러운 마음으로 들여다보는데 여준의 감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더니 꿈결 같은 눈망울로 나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언니, 사람의 소리가, 미치도록 아름다운, 사람의 노래야.”

그러더니 다시 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나는 여준을 흔들어 깨우려다가 멈췄다.


꿈에서 깬 듯 실제로 놀란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 꿈이었을까. 꿈이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자세한 삼십 년 전의 기억이었다.

계속된 열로 인해 나의 해마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러나 어찌 되었건 당시의 기억이 복원된 것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나는 그때의 기억을 일부러 송두리째 묶어서 뇌의 어느 한쪽에 묻어 두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여준과 함께 했던 프랑스에서의 기억은 전무했고, 있다 하더라도 크로키처럼 간단하고 아주 단편적이었다.

맞아, 그때 여준인 엄청 말라 있었다. 어쩌면 그 이전부터도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당시에 나는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내느라 어디에도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여준은 이미 동양에서 온 뉴페이스의 화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여준의 그림은 꾸준히 팔렸고 비교적 경제적으로는 안정적이었다. 그런 여준에게 변화가 온 것이 노래하는 남자와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내 기억은 거기서 끊어져 있었다.

<네 동생이 어디 있니?>

일찍 일어난 새들이 창 밖에서 떠들기 시작했다. 새들의 소리에 묻혀 들어온 갑작스러운 질문에 오한이 났다. 소리를 무시하고 물을 벌컥대고 마셨다.

동생을 내가 지키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열에 들뜬 머리를 흔들었다. 끝없는 의문만 남았다.

노래가 뭐길래 여준은 그런 선택을 한 것일까.

잘 나가던 화가의 삶을 버렸을까.

레바논인지 요르단인지 중동 어디서 온 남자의 얼굴은 생각도 나지 않지만 분노가 일었다.

그러나 분노하기에도, 의문을 갖기에도 난 마땅치 않았다. 여준이나 남자나 노래나 내가 아는 바가 없는데 분노한다는 게 맞는 얘긴가. 혹시 다른 감정은 아닐까.


창은 완전히 환한 햇빛으로 차올랐지만 열에 들뜬 내게는 신기루처럼 아련했다.

병원엘 가야 할 모양이야.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는데 현기증이 났다. 그리고는 주저앉았는가 싶었는데 깨어난 시각은 해가 중천에 뜬 낮이었다.

반나절을 기절해 있었네. 독거노인 고독사가 남의 일이 아니군.

그런데 거짓말같이 열이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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