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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Mar 17. 2023

어떤 하루

은퇴 후 세월이 벌써 6년이었다. 

3년은 전원살이를 꿈꾸며 사방 천지에 주택을 보러 다니느라 날이 가는 줄 몰랐고, 나머지 3년은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었다. 

그나마 코로나 직전에 다녀온 크로아티아가 마지막이었고 이후에는 이렇다 할 여행의 기억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매사에 짜증을 내고 가끔씩 말이 없는 내가 걱정이 되었던지 남편은 가까운 곳에 여행이라도 가자고 했다. 사실은 말하기뿐만 아니라 먹고사는 모든 일이 귀찮았다.

남편의 생각은 고마웠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왜냐하면 여행의 일정을 계획하고 숙소와 교통편 예약하고 운전하고 하는 일이 모두 내 몫이었기에. 

    

“나도 좀 편안히 다니고 싶거든? 나중에 갑시다. 노인네들 패키지로 가는 걸로.”


그러자 남편은 내심 기뻐하는 듯했다. 남편은 나와 달리 여행을 즐기지 않는 고양이 같은 사람이었다. 여행을 가도 호텔에서 묵어야 하고 좋은 음식에 편안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곳을 선호했다. 반면에 나는 유목민 같았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나도 편안함 쪽으로 기울었지만 어쨌든 소위 휴양지 같은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패키지도 더 나이 먹으면 안 받는대요. 사돈네 거부 당했다잖아.”     


딸네 쪽 사돈은 우리와 거의 띠동갑으로 80 즈음인데 얼마 전 제주도 패키지 여행사에서 거절하더란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분들이 패키지로 국내 여행을 간다는 것도 새로운 뉴스였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자가 운전해서 강원도 철원부터 마라도까지 바람처럼 돌아다니던 정력적인 부부였기 때문이다. 그런 분도 이젠 자가 여행이 귀찮고 힘들어서 패키지를 신청했는데 거절이라니 참으로 인생무상이었다.  

    

“그래서, 어디 가자고? SRT로 부산 갈까? 통영 쪽은 SRT가 안 간다며?”


남편은 성의 있게 물었다. 분명히 어딘가 가야 될 것 같긴 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SRT 예약도 내 몫이고, 또 가면 거기서 차를 렌트해야 할 텐데...... 아, 귀찮아.”


남편에게 아주 성의 없이 대답하곤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밥도 하기 싫은데 점심이나 나가서 먹고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 초월 쪽에 내가 좋아하는 한정식 집이 있어서 그곳엘 가자고 하면서 시어머니 얘길 곁들였다.  

    

“지난번 시골 갔을 때 형님이 어머님 돌보기 힘에 부친다고 요양원 알아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퇴촌 들러서 시설 좀 둘러보고 초월서 점심 먹는 거 어때요?”  

   

더 말할 나위 없이 남편은 기뻐했다. 그때만 해도 남편이 왜 그렇게 기뻐하는지 난 진정 몰랐었다.     

 

“거기 가서 이모도 보고 오면 되겠네.”     


아뿔싸. 퇴촌의 요양원에 시이모가 입원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난 면담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혹시 시어머니가 요양원을 오시게 될 상황이 언제일지 모르니 대비해야 되겠단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남편은 시이모 면담 생각부터 한 것이었다.  

    

“여보세요. 난 시이모를 만나러 가는 게 아냐. 요양원 정보를 얻으러 간다고요. 내가 시이모 요양원까지 찾아다녀야 돼? 그건 아니라고 봐.”


내 반응에 남편은 잠깐 멈칫했다. 

마누라가 밉살스럽게 따지고 태연하게 ‘아니요’를 해대는 여자인 걸 알긴 했으나 참으로 대단하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거기까지 가서 이모를 안 만나고 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불쌍하지도 않아?”


남편은 거의 화를 내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나도 생각을 철회할 마음은 없었다.   

  

“구분은 정확히 해야죠. 점심 먹으러 가면서 요양원도 알아보자는 게 우리 일정이라고요. 거기에 이모를 만나는 것은 아니죠. 시어머니가 부족해서 시이모까지 봐야 돼요?”


몇 차례 일정을 포기할 만한 위태로운 말이 오가긴 했으나 시끄러운 게 싫은 나는 그냥 양보하기로 했다. 에이 씨. 그러자 남편은 한 술 더 떴다.  

   

“뭘 사가야 하나? 뭐가 좋지? 노인들 나눠 드실만한 거. 그런데 잘 드시지도 못하고. 용돈을 드려야 하나? 그게 낫겠네.”


난 더 이상 참견하지 않았다. 60명이나 된다는 노인들 간식을 사가든지 말든지 용돈을 드리든지 말든지 상관하기 싫었다. 자기도 요양원을 가야 할지를 고민해야 할 나이에 웬 오지랖이람. 상황도 모르고 뭘 어떻게 준비해 간다는 건데? 

하여튼 남편은 용돈을 준비한 것 같았고 우리는 서로 입을 꾹 다문 채 3번 국도에서 퇴촌으로 접어들었다.  


   

요양원의 입소자 면담을 위해서는 코로나 신속항원키트 검사를 해야 했기에 그게 또 화가 났다. 코를 찌르는 게 우선 너무 싫었고 이렇게까지 해서 시이모를 내가 왜 봐야 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코도 찌르는 둥 마는 둥 해서 검사를 마쳤다. 남편은 너무 열심히 찌른 나머지 코피가 날 뻔했다.  

    

“이모, 저 알아보시겠어요? 큰 조카.”     


요양사 손에 휠체어에 실려 온 시이모는 가시처럼 마른 몸에 담요를 어깨와 무릎에 겹겹이 둘러 덮고 있었다. 그러고도 춥다고 해서 사무장이 다시 담요를 무릎에다 덮어주었다.  

    

마스크를 내리고 나서야 이모는 알아보는 눈치였다. 목소리가 너무나 작아서 입에다 귀를 바짝 갖다 대어야 했다. 남편은 그나마 귀가 어두워서 이모의 소리를 잘 알아듣질 못해 내가 확성기가 되어야 했다. 

금방 바스러질 것 같은 이모를 보자 떼쓰며 만나기 싫어했던 내가 조금 후회되었다. 


이모는 시어머니와는 열 살도 더 차이가 나는 막내였고, 내가 시집왔을 무렵에는 유머가 넘치는 멋쟁이였었다. 조카들과 나이 차이도 많지 않으니 남편도 누나처럼 따르던 사람이었다.   

   

“이모, 식사는 잘하세요? 여기가 어때요?”


식사를 잘 못해서 죽만 드시고 우울증으로 거의 움직임이 없다는 사무장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달리 할 이야기가 없었다.    

  

“집이 더 재밌어.”


겨우 힘을 끌어 모아 내 귀에다 들릴락 말락 한 음성으로 넣어준 이모의 진심이었다. 

이모의 딸들 얘기에 따르면 요양원이 너무 좋아 집에는 가기 싫다고 하셨던 이모였다. 

     

“집에 가셔도 아무도 없잖아요.”


이모가 집에 가도 방법은 없었지만 그래도 집이 좋다고 이모는 반복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자식을 생각해서 요양원이 재밌다고 얘기하셨다지만 그것을 믿고 싶었던 것은 자식의 마음이었을 뿐.  

    

우리는 거의 20 분을 아무 얘기도 없이 비닐장갑을 손에 낀 채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준비해 간 용돈 봉투를 겹겹이 담요로 둘러싸인 이모의 손에 쥐어주고는 요양원을 나섰다. 

이모의 모습을 보고 나오면서 내 마음도 안 좋았으니 남편은 더 했을 것이다. 

그러게 만나지 말자니까. 하여튼.  

    

“당신 칼국수 좋아하니까 저기 국숫집에서 먹고 갈까?” 


남편의 말에 바라보니 요양원 맞은편에 우중충한 칼국수 집이 있었다. 

또다시 화가 나려는 데 참고 말했다.   

   

“난 오늘 오랜만에 제대로 된 점심을 먹고 싶어서 나선 길인데 당신은 결국 문병하는 일로 만들어버렸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무 데서나 국수를 먹자? 난 싫어. 혼자 먹던지.”  

   

정말 이 남자는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를 잊어버린 걸까? 

시이모를 만나기 위해 나섰던 길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메이징 하다.     


“아니, 난 당신이 국수를 좋아하니까 좋으면 먹자는 얘기지. “


남편의 궁색한 말에 더욱 화가 났지만 여전히 시끄러운 게 싫은 나는 다른 곳으로 가자고 담담히 말했다. 

결국 양평 쪽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데 마음이 착잡했다.  

    

“전에 누가 소개한 요양원이 초월 쪽에 있으니 가는 길에 한 번 들러나 봅시다.”  

   

남편 또한 같은 마음일 것 같아서 한 군데를 더 들렀다. 상담을 했지만 대기번호가 길었다.    

  

어떡해야 하나? 

시어머니는 배변 실수가 생기기 시작해서 손이 많이 가는 상황이었고 몸은 심히 건강하셨다. 

언제라도 사촌 형님이 두 손 들고 못하겠다고 하면 요양원 외에 다른 대책은 없는 상황이었다. 

혹시 상황이 안 좋으면 남편은 우리가 가서 다만 얼마 동안이라도 돌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얘기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었다. 

나를 낳고 길러주신 친정부모도 단 하루를 돌보지 못했는데 이건 경우가 아니지라는 생각에 대답도 하기 싫었다. 본인이 혼자 가서 돌보던가.

     

제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시길. 

더 험한 삶 겪지 마시고 집에서 주무시다 꿈처럼 돌아가시길. 

모두 다 원하는 바이지만 거의 이루지 못한다는 걸 어머니나 우리나 모르지 않았다. 

    

내 코가 석자인 상황이 곧 닥칠 텐데 우리에게는 아직도 미완성인 부모님의 삶이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참으로 아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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