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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인듯 Mar 30. 2023

소풍

나의 시아버지는 납골당인 분당 메모리얼파크에 계신다. 

8년 전에 돌아가셔서 이곳에 모셨다. 그때 나의 남편은 말했었다. 

     

“여기 12구가 들어갈 수 있다니까 당신과 나도 결국 이리 올 거야.”


12구란 시부모님과 아들 다섯 부부의 숫자인 것 같았다. 

물론 나는 죽어서까지 시월드에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돌 항아리에 담긴 채 오랜 세월 썩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도 싫었다. 


시부모님보다 먼저 가신 친정 부모님은 옥수수 전분으로 만든 항아리에 유골을 담아 수목장을 했다. 나무에는 두 분의 이름이 새겨진 나무 팻말만 걸려 있을 뿐이고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그 팻말도 곧 뗄 때가 되었다는 소식이 왔으니 얼추 십오 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었다.  수목장 관계자 말로는 진즉 다 흙으로 흡수가 되었을 것이라는데 우리 시아버지는 아직도 튼튼한 돌 항아리 안의 가루로 남아 계실 거였다. 

     

나는 납골당은 물론 수목장도 싫고 공인된 어떤 장소에 그냥 가루로 뿌려지고 싶었다. 살아서도 그렇지만 죽어서는 더욱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근처에 그런 곳이 있다고 해서 알아보았지만 우리 애들은 아마도 메모리얼 파크의 가족묘에 나를 안장할 것이다. 그게 가장 쉽고 자연스러우며 편안한 선택 아니겠는가. 그래서 아이들을 위해 수목장이니 산장이니 하는 유언은 하지 않기로 했다. 죽어서도 그냥 시월드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나마 죽고 나서니 얼마나 다행인가.  

   

메모리얼 파크엘 가면 난 시아버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근처의 모든 고인들의 묘비를 돌아보곤 했다. 남편은 남의 묘를 뭐 그렇게 관심 있게 보느냐고 했지만 상관없었다. 남편이 시아버지의 묘비를 정성껏 닦고 먼지 낀 조화를 정리하는 게 취향이라면 난 다른 집 묘비를 열심히 읽고 다니는 게 취향이었다. 


각 묘비마다 새겨진 말씀들은 대개 종교적인 것이 많았으나 시나 혹은 고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 놓은 것도 있었다.    

  

가족묘 중에는 집안이 장수를 하고 부모부터 자녀까지 죽음의 순서가 차례대로인 곳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가정들이 순서가 뒤바뀌어 있었다. 


남편보다 더 젊었던 아내가 일찍이 떠난 경우도 있었고 아들 며느리가 순서를 바꿔 시부모보다 앞선 경우도 있었다. 

어떤 집은 부부와 두 아들 며느리가 있었던 모양인데 모두들 요절하고 내 또래의 아들 하나만 생존해 있었다. 출생 연도는 있으나 아직 죽음의 시간을 적지 못한 한 아들의 이름을 보면서 남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그의 신산한 삶이 느껴져 마음이 먹먹했다.

 

그중 가장 가슴 아픈 것은 부모보다 먼저 떠난 자식의 생몰연대를 볼 때였는데 그런 가정도 적지 않았다.

 불과 20대에 생을 마감한 어떤 묘비에는 ‘누구야, 보고 싶다.’라는 문장 하나만 새겨져 있을 뿐인데 그 절절함에 내 일인 듯 마음이 아렸다. 


어떤 묘비에는 천상병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또 다른 곳에는 좋은 바람이 불면 당신인 줄 알겠노라는 시가 씌어 있기도 했다. 

바람이 많은 이곳을 생각했음일까?   

   

누구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고 당연히 본 적도 없었던 사람들의 사연은 그렇게 마음으로 스며들었다. 


이곳에 잠들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묘비에는 가족 간의 그리움과 사랑과 아쉬움이 마치 무지개 솜사탕처럼 섞여 있었다. 살면서 갖고 살았을 원망이나 시비, 섭섭함과 분노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 다 이렇게 결국은 사랑해, 그리워, 다시 만나.라고 할 거면서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비극이구나.’   

  

시아버지의 묘역을 지나서 다른 묘역으로 뚫린 길을 천천히 걸었다. 


같이 온 남편은 세차한 차에 걸레질을 하느라 멀리서 보기에도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었다.    

  

‘이 봄날에 웬 고생이람.’ 

    

그런데 그것 또한 남편의 선택이었고 난 그 선택을 존중하기로 해서 남편을 부르지는 않았다.  

    

묘역 한두 군데에 2월 1일부터는 조화를 가져오지 말아 달라는 부탁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한낮의 햇볕이 내리쪼이는 곳이라 생화나 화분이 견뎌내질 못하는 곳이어서 대부분의 묘는 조화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시아버지의 묘도 각종 알록달록한 조화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난 볼 때마다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 

     

“저게 무슨 낭비야. 경쟁적으로 조화를 갖다 놓았네.”


나의 심통 맞아 보이는 말투에 남편은 늘 같은 소리로 답을 하곤 했다.    

 

“그래도 아버지 묘가 너무 쓸쓸해 보이면 안 좋잖아? 공원에 꽃 핀 것 같아 좋은 데 뭐.”    

 

조화가 만발해 있다고 해서 쓸쓸해 보이지 말란 법은 없는데 마치 동의하듯 남편과 시동생은 조화를 쉬지 않고 갖다 놓았다. 그런데 이제 그 조화를 금지한다니 참 기쁜 소식이었다. 

     

혼자 어슬렁거리며 산으로 둘러싸인 묘역을 한 바퀴 돌았다. 

어디나 납골묘가 규칙적으로 줄지어 있었지만 이장을 하지 않아 봉분을 가진 산소도 상당히 보였다. 이장을 하라고 꼬드겨도 그대로 놓아두었던 모양인데 그 모습이 차라리 더 낭만적이었다. 

나는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떼가 잘 입혀진 다른 사람의 산소가 보기 좋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이중성 때문이었다. 

     

사방은 봄꽃으로 흐드러져 있어서 빛나는 햇살 아래 온갖 색깔이 각각 영롱했다. 

죽은 자들은 조용했고 산 자들은 거의 없어서 공기조차 투명했다.   

    

‘소풍 하기 좋은 날씨야.’   

  

편안하게 걷고 있는데 아래쪽 2시 방향에 중년의 남자가 제사를 모시고 있었다. 아니 제사는 이미 끝난 듯 남자는 비스듬히 머리를 손끝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묘비 앞에는 과일과 떡, 술 등이 가지런했고 남자 외에는 사람이 없었다. 

바람결에 남자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애들은 못 왔어. 섭섭해하지 마.”  


아직 엄마를 떠나보내기엔 아이들이 어릴 것 같은 나이의 사내였다.  

    

“당신 좋아하는 진달래, 개나리가 지천이네. 전에 당신이 소풍 온 것 같다 그랬지? 맞아. 소풍이군.”     


남자는 힘겹게 일어나 옆에 떨어진 진달래 꽃잎을 제상에 올렸다.

      

남자의 말 중에서 ‘소풍’이란 단어가 내 귀에 착 달라붙었다. 아마도 남자는 생전의 아내와 함께 이곳을 다녀간 모양이었다. 그때 그녀도 나처럼 묘지 방문을 소풍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긴 산과 들과 꽃과 나무, 작은 개울까지 가지고 있는 이곳은 묘지이기도 하면서 공원이기도 했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은 소풍을 왔다 갔고, 저 남자는 소풍 중에 있으며 나 또한 소풍 삼아 이 납골당을 찾았으니 인생이 소풍인 것은 맞다고 생각했다. 

     

바람 한 줄기가 다가오더니 벚꽃을 남자의 머리에 흩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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