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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노명 Mar 17. 2024

          일흔 살 만세

                    일흔살은 잃은 살이 아닌 이룬 살이다

   칠십 그릇 째의 떡국을 먹었다는 고향동무의 카카오 톡 문자를 받았을 때만 해도 그저 예사로운 느낌이었다. ‘아, 오늘이 구정이구나` 했고, ‘한 해에 한 번이면 충분할 걸 뭐 하러 두 번씩이나 설을 쇠나’ 혼잣말을 했다. ‘나는 떡국을 안 먹으니 나이도 안 먹는다’ 라거나 ‘미국에서는 미국 나이를 먹으니 나는 아직도 70이 아닌 60대’라는 따위의 참과 농이 섞인 문자를 친구들과 주고받기도 했다. 

   실제로 나는 출생신고를 늦게 한 덕에 아직 60대 중반의 나이다. 고향을 떠난 후로 내 출생의 나이로 살아 본적이 거의 없어서 서류상의 나이에 더 익숙해 있다. 주민등록증으로 나이를 확인하고 서열을 따졌던 사회에서 나보다 늦게 태어난 것이 연장자 행세를 하는 게 참 억울 했던 사춘기, 그런 또래들을 피해 중년 이상의 어른들 속으로 파고 들던 습관은 지금도 남아있다. 어른들과 어린 아이들은 쉽게 가까워져 친하게 지내지만 비슷한 나이의 사람들은 불편한 것이 그때 그 습관의 연장인 것 같다. 

   미국인들은 나이를 묻지 않았다. 사적인 질문은 상당히 무례한 일로 간주되어 나이를 물어보는 사람은 의사나 간호사가 고작이었다. 그러니 나이를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대신 생년월일은 반드시 기억해야 했다. 모든 서류나 기관에서 신원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생년월일을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세월이 쌓이면서 내 출생의 나이는 남의 것처럼 낯설어졌지만, 새해가 되면 한국의 가족들과 고향친구들에 의해 새삼 반추 되곤 했다. 특히 십년 단위의 해에는 좀 특별했다. 50세, 60세, 그리고 70세가 된 올해의 설날이 그랬다. 그래도 그 전의 것들은 조용하게 지나간 편이었다. 요즈음 오십은 나이도 아니라든가, 요새 환갑은 미역국 한 그릇으로 때운다는 식의 가벼운 대화로 담담하게 넘겼다. 

   그런데 칠십이라는 올해의 나이는 다른 느낌이 가미되어 있었다. 칠순이라거나 고희라는 예스러운 표현도 나이에 무게를 얹었다. 시쳇말로 가스라이팅 당하는 것인지, 나는 아직 60대 중반이라는 확고했던 의식이 흔들리며 내가 칠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았구나 하는 착잡한 감회가 어우러졌다.

   “우리가 벌써 일흔 살이라고?!”

   “그래, 예전 같으면 상노인들이지.” 

   고향의 친구들과 그런 장단을 주고받으며 노년시대로의 돌입을 곱씹기도 했다.


   그랬다. 우리 어릴 적 시골에서는 칠순을 넘기면 어른 중에도 상어른으로 섬김을 받았다. 환갑만 지나도 여분의 인생을 사는 것처럼 대우를 받았지만, 칠십을 넘기면 아예 인간존재를 초월한 신령한 상징이라도 되듯 공경을 받았다.  

   “그 환갑노인이, 논바닥에 물 고이는 것 본다고 논두렁에서 하염없이 비를 맞고 계시더라니까 ...” 

   오랜 가뭄을 적시는 달디단 빗줄기에 함유된 맛의 농도를 비에 젖는 환갑노인의 눈빛보다 더 강렬하게 표현할 방법도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 칠순어른의 위상이야 더 말 할 것도 없었다. ‘아이구! 상어른께서도 그 일에 역정을 내십디다’ 라고 하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으로 규정되었고, ‘그 상어른까지 거기 참석을 하셨더라’고 하는 모임이면 가히 근동을 떠들썩하게 할만한 대단한 경사나 조사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 앞집에도 칠순을 넘긴 할아버님이 계셨더랬다. 허리춤에 달린 검은 갈색의 침통과 안경집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성인들에게는 진정한 공경의 대상이었다. 사람도 가축도 탈이 나면 그 어른의 만짐을 받거나 침을 맞았다. 그러면 신통하게도 고침을 받았다. 나도 배탈이 나서 발가락 사이에 침을 맞은 적이 있었다. 울지 않고 잘 참는다며 칭찬을 해 주셨는데, 사실 나는 무서워서 울지 못한 것이지 잘 참은 것이 아니었다. 물론 아픈 배는 나았다. 

   이웃 간에 크고 작은 시비거리가 생겨도 대표격인 사람들이 그 어른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지혜를 얻었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그 어른의 말씀대로 해결이 되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할아버지 뿐만 아니라 때의 어른들은 나이 값이라는 것을 할 줄 알았고 랫사람들은 어른을 존중할 줄 알았다. 그래서 나나이를 먹으면 모두가 품위와 지혜를 갖춘 어른되어 존중받는 것으로 믿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지금은 백세 이상의 한국인 숫자가 진작에 2만명을 훌쩍 넘어선 백세시대란다. 노인정에 가면 70대는 연장자들의 잔심부름이나 해야 하는 젊은이 취급을 받는다는, 참말인지 우스개인지 모를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기야 내가 사는 이 자락마을에도 100세를 넘긴 할머님이 두 분이나 계시고 65세 이상의 노년층이 25%에 달한다는 통계였다. 경로우대의 대상이 되는 노인들이 이 마을에만 180명 이상이 된다는 뜻이었다. 다만 연상 연하를 따지는 대신 건강상태에 따라 봉사자와 피봉사자가 분류되는 것은 한국의 노인정과 다른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백세시대라고 해도 칠십이라는 나이는 고령이 분명했다. ‘아직은 어쩌고.…’ 할 여유로운 나이는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들어가는 젊은이 취급을 받는 이유는 고령화 시대로 인한 희소가치의 상실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예전의 어르신들은 점잖게 연세를 드시고 품위와 인격으로 소화를 해 내셨지만, 기름진 나이를 폭식한 이 시대의 꼰대들은 지식체증과 상식경화를 앓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도 이유에 포함될수 있을 것 같다.     

   

이른 아침 산책길, 언덕에서 늘 만나는 동네 어르신. 우리 멍뭉이들의 최애 할부지다. 

   “그래, 너는 칠십이 된 지금도 철이 안 들었나?”

   핸드폰에서 친구의 음성이 폴짝 튕겨 나왔다. 가슴속이 썰렁해지는 느낌이었다. 전에는 철이 없다거나 바보스럽다는 핀잔이 싫지 않았었다. 세상 때가 덜 묻었다는 말을 에두른 것 같아서 은근히 즐겁기도 했었다. 그런데 일흔 살의 철없음은 왠지 노망기에 맞닿아 싫은 느낌이었다.   

   “철 들면, 죽는다잖아.“ 

   나는 과장되게 생기 넘치는 목소리로 명랑하게 응수했다. 

   “철이 들거나 안 들거나 이제 죽음도 우리한테서 그리 먼 얘기는 아니다.”      

   탄식같은 친구의 말에 가슴속이 더 썰렁해졌다. 툭! 소리도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늙음이나 죽음에 대해 꽤나 초연한 척 굴었다. 

   재작년에 찍어 본 가슴 엑스레이 사진에서 오백원짜리 동전 크기의 혹이 두 개나 발견되고, 그것이 암덩어리 일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도 맨 먼저 생각한 것은 갚아야 할 빚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알게 모르게 쌓인 마음의 빚까지 청산하고 간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못해도 금전과 물질의 빚은 가급적 청산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곰곰 생각을 더듬어봐도 빌리고 갚지 않은 돈이나 물건은 없는 것 같았다. 가벼워진 듯한 마음으로 스스로를 대견해하다가 괜히 민망스러워 고개를 떨구었다. 본 사람이 전혀 없는데도 그랬다.  

   초음파검사로 다시 확인해 본 결과 유방암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췌장에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그 쪽으로 검사를 해보자는 의사의 말을 나는 거부했다. 가장 완치가 어려운 것이 췌장암이라면서 검사는 해서 뭐 하냐고, 이만하면 살만큼 산 것이니 허락된 날들이나 조용히 살다 가겠다고 했다. 

   누우면 심하게 달려드는 왼쪽 상체의 통증과 소화불량, 그리고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대수롭지 않았다. 다만 나 하나밖에 모르는 똘이와 콩이가 걱정이었다. 녀석들에 대한 걱정이 울컥 솟구치면 마음이 저리고 시큰거렸다. 정말이었다. 나의 죽음이 아니라 남겨질 멍뭉이들이 내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죽음도 멀지 않다는 탄식같은 친구의 말을 듣자, 죽음에 대한 내 마음가짐에 약간의 의혹이 생겼다. 혹시 내가 담대한 척하려고 나 자신에게 체면을 걸었거나 과장된 허세를 부리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이었다. 사실은 나도 죽음이 두려워서, 당면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대신 딴청을 부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전화기에서 친구의 말이 계속 튀어오르고 있었다.

   “나도 죽을 때가 된 건지, 갑자기 쓸데없는 생각이 들고 그런다. 나는 뭔가, 도대체 누구인가, 뭐 그런 생각들…. 너는 안 그러니?”

   “글쎄다. 죽음을 논하기엔 아직 이른, 일흔살 아니야?" 나는 얼른 미국나이의 나 자신으로 돌아오며 시치미를 뗀 여유를 부렸다. "게다가 난 아직 60대 중반이라고!”

   친구는 이제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난 일흔 살이라는 말 자체가 싫어. 잃은 살이라니, 잃어버린 인생살이라는 말 같잖아.” 

   “아니지, 모두 이루어 낸 삶이라는 뜻으로 ‘이룬 살이’라는 것이지. 너도 그쪽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여 봐. 이.룬.살.이로 들리지 않아?”

   결국 일흔 살은 다 이루어 낸 완숙한 의미로 여겨야 한다는 내 소견에 둘의 마음이 모였다. 이룬 삶이란 자유한 삶이다. 그게 재물이든 사람이든 나를 구속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놓여나는 것, 오늘 당장 죽음과 마주한다 해도 두렵거나 아쉽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한 오라기의 욕심이나 미련도 걸쳐지지 않은 완전한 알몸의 삶, 우리들의 일흔살은 그래야 한다. 

   유치한 말장난에 다름아니란 비난을 받더라도 잃은 삶 보다는 이룬 삶이라는 게 훨씬 멋도 있고 맛도 좋지 않은가

   그 후로 나는 새해 안부를 묻는 동갑내기 친구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기 시작했다.       

   “어 그래, 일흔 살이다. 다 이루어 낸 자랑스런 이.룬.살이라고. 모든 것 내려놓고 벌거벗은 빈몸으로 즐기기만 하면 되는 자유한 삶. 일흔 살 만만세 아니냐?”

   54년생의 모든 말띠들이 서부 황야의 야생마들처럼 강건하고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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